저 이제 라면 안 먹으려고요

라면 보이콧 선언

by 웬즈

상병 말이었던 어느 나른한 토요일 오전, 나는 생활관 침상에 앉아 보급받은 컵라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면을 아예 안 먹어 보면 어떨까?'


나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나를 괴롭혔던 피부병이 있었다. 고2로 학년이 올라가면서부터 스무 살 초반까지, 내 피부는 한동안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다시 갑자기 악화되었다. 나는 그렇게 군생활 내내 악성 트러블에 시달렸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 이러한 전력이 있으셔서 친척들은 내 피부가 유전 때문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렸을 때 나는 그 얄미운 DNA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청소년기에 시에서 유명하다는 피부과도 몇 차례 가봤으나 자신 있게 나에게 선보였던 의사의 처방은 별 효과가 없었고, 만간요법, 한방치료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으나 모두 헛수고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 문득 본 컵라면이 지난 고역의 날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식습관이 피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고는 있었기에, 라면을 먹지 않으려고 종종 시도했으나 여태껏 그 고소한 향기에 전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음을 다잡고, 라면을 입에 절대 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나는 라면을 끊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십몇 년 간 달고 살아온 라면을 피하기만 한다고 통할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라면을 끓이는 모습을 보거나 직접적으로 냄새를 맡을 날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무작정 피하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라면이 불구대천지원수라도 되는 듯한 자기 최면이 필요했고, 본질적으로 라면을 싫어하는 자아를 만들어 내야 했다.


그 자기 최면을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주변인들에게 라면을 안 먹는 사람이다고 말하고 다녔다. 타자가 의식하는 나의 모습이 곧 자기 최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 초기에는 가게에서 진열된 라면 봉지만 봐도 흔들릴 때가 많았지만 이제 라면 먹기에 최적합하다는 엠티 이튿날이 되어서도 라면을 보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편 우리 아버지는 담배를 끊었다. 어렸을 적부터 늘 아버지의 담배 한 갑은 어머니의 사천 오백 원짜리 원성으로 환산되었는데, 그 계속되는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새로운 라이터를 신발장 위에 두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돌연 금연을 결심했다고 내게 전하셨다. 당시 나는 그 결심의 무게가 아버지가 태우셨던 한 까치의 연기쯤으로 느껴졌다. 비흡연자인 나로서도 금연의 어려움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고, 아버지 역시 실패한 전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담배를 끊는 차원이 아닌, 참는 것이 얼마나 지속될까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아버지께서는 담배를 한 까치도 태우지 않으셨다. 간간이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슬기로운 금연 생활을 전해주곤 하셨는데, 몇 주 동안은 우울해 계신가 했더니 몇 달이 지난 시간을 기점으로 활기를 되찾으셨다고 한다. 이제는 옆에서 누군가 흡연을 해도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한 번은 저녁식사를 하던 중 담배를 어떻게 끊었는지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승전보를 울리듯 비법을 이야기해주셨다. 처음에는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등산과 운동으로 한두 번씩 스트레스를 해소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애써 속이 건강해지는 느낌을 겨우 받았고, 그 느낌에 힘입어 본인은 본래 등산과 운동을 좋아한다는 말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면서 주말마다 관성적으로 산에 갈 채비를 하는 본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담배 피우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 비슷하게 자기 최면을 금욕에 이용한 아버지의 무용담에 나는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산에 가는 게 담배 피우는 것보다 재밌더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금욕주의를 비판하고 욕구가 삶을 이끌어가는 연료임을 주장했다. 그처럼 나도 욕구가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일부 동의한다. 내 주의는 금욕을 중시했던 그리스도교 교리보다 중도를 설파했던 불교의 교리에 더 가깝다. 자연스럽게 촉발되는 욕구에 대해 능동적인 자세가 갖춰진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욕구를 추구하는 행위가 삶에 곰팡이를 드리운다면 그것은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욕에 성공하고 싶다면, 의식적인 노력도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본인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심리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자아에 대한 원론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이 금욕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그 대상을 회피하는 것은 언제든지 유혹에 흔들릴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대상에 대한 본인의 시각 자체를 고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기 최면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삶의 질을 보다 제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최면조차 성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하고 자기 최면을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본인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 것이다. 나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자아를 알리고 다닌다거나, 혹은 아버지와 같이 주의를 다른 방향으로 환기하며 자아의 방향을 선회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금욕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돌이켜보니 조금 죄송한 건, 내 식단 변화로 인해 어머니가 눈치를 봐야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라면 냄새를 맡아도 라면을 안 먹고 싶다고 말씀을 드리지만, 어머니는 혹시나 내가 한 결심이 당신께서 끓인 라면으로 망가질까봐 나와 동석할 때에는 본인도 라면을 끓이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죄송하단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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