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담임이시잖아요

말 한마디가 가진 힘의 불균형

by 웬즈

한창 떠들썩하게 학교 축제를 준비하던 중학생 시절의 어느 날, 담임 선생님과 있었던 일화가 가끔씩 생각난다. 그때 우리 학교 축제에는 이례적으로 학급 별 부스와 단합복이 허용되었는데, 당시 반장 직이었던 나는 그 새로운 축제 방식이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근거렸다. 지금은 많은 학교가 해당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때 우리 교장선생님은 조금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부스와 단합복 허용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파격적인 공지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축제'라는 이미지에 학교 축제가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에 설레여 하며, 나는 중학생 신분으로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축제를 공들여 준비하고 싶었다.

학급 회의를 마친 뒤에 나는 회의록을 들고 교무실에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은 컴퓨터를 보고 계셨고, 나는 조심스럽게 축제 관련 상담을 요청했다. 나는 갓 취직한 영업사원처럼 회의에서 나온 부스 콘셉과 단합복 쇼핑몰 리스트를 보여드리면서 자세하게 계획을 설명드렸다. 그러나 얼핏 눈치를 보아하니, 담임 선생님은 축제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고 반장인 내게 결정 권한을 넘기면서 상담을 끝맺으셨다. 그래도 최종 결정 권한은 담임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겠거니 생각하며 나는 조금 속이 비어 보이는 웃음을 짓고 말했다.

"하하하, 그래도 담임이시잖아요."


선생님께서는 그 말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시다가, 때마침 울린 종소리에 다시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오고는 말씀하셨다.


"그러게, 이따가 한번 생각해볼게."


그날 밤이었다.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잠깐 할 말이 있다며 방으로 들어오셨다. 저녁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내가 무심코 했던 '그래도 담임이시잖아요.'라는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더란다. 16살이었던 나는 그 말이 내포할 수 있는 서운함이 무엇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초지종을 어머니께 항변하듯 설명드렸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내 당황스러움도 일견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서운함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세상 사는 것이 그렇게 두부 자르듯 단순한 것은 아니라면서, 잘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시며 방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달도 내가 했던 말이 어떤 파급력을 가지고 선생님께 닿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성인이 된 나는, 방송에 출연한 차홍 디자이너를 보고 그 일이 다시 떠올랐다. 해당 방송에서 차홍 디자이너는 뚱한 표정의 고객에게 시술한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는지 물었고, 그 뒤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단 두 문장만이 오고 갔는데도 나는 그녀가 얼마나 말을 세련되게 할 줄 아는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치 두 번의 오고 간 랠리만으로 탁구 선수의 운동신경을 가늠한 것처럼 말이다.


"제가 표정이 원래 이래서요."

"아, 원래 감정을 잘 절제하는 타입이신가 봐요?"


제삼자의 입장에서 들었음에도 순간적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받아친 말은 별로 어렵지 않은 듯이 정말 순식간에 나왔다. 화자가 가볍게 던지는 말이 청자에게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느꼈다. 그 쯤까지 생각할 무렵, 일전에 내가 선생님께 건넸던 한 마디가 몇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나에게 들려왔다. 어느덧 나는 당시의 내 나이보다 당시의 선생님 나이에 가까워졌고, 그때 선생님이 가졌음직한 감정이 혹시 이러한 것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본인의 직위를 따지듯 물어보는 중학생에게서 예의에 어긋난 치기 어림을 보고, 업무로부터 기인한 예민함에 일종의 서운함을 내비치셨을 것이다. '그래도 담임이시잖아요'라는, 단순해 보이는 말의 함의를 선생님은 댁에 돌아가셔서도 곱씹었을 것이다.




이론 상으로는 수학 공식 외우듯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항상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한 말을 꺼내는 것은 지독히도 어려운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전체 맥락을 유연하게 파악함과 동시에 상당한 순발력을 요하는 행위로서, 사소한 대화가 오가는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사고 구조를 내재화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노력과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본인의 입장을 고려하기도 바쁜 와중에 상대방의 감정선까지 파악하여 말을 하는 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바둑과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체스를 동시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고 느껴진다. 나와 상대방이 가진 감정선을 파악한 뒤 최대한 그 맥락들의 교차지점들 중 최선의 수를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본인의 자아가 가진 감정선만이 정답인 것으로 종종 착각하곤 한다.


말은 그 사용이 오묘해서, 그 원래 의도와 빗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말을 껌처럼 함부로 뱉었다가 상대방의 뇌리에 달라붙어 엉킨 관계가 많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 말이 향으로 남아 누군가의 기분전환을 도왔다는 경우도 있었다. 두 가지의 경우 모두 악의나 선의 없이 했던 이야기인데도 돌아오는 청자의 감정 상태는 전혀 달랐다. 이것은 나와 청자가 가진 감정선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의도만 고집해서 말하는 것은 청자의 감정을 걸고 하는 도박이었고, 청자의 입장을 고려한 의도로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의 수가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에게 상대방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해 말을 하는 것은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꺼낸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던 경우가, 내 기억에는 없을지라도 아마 한두 번 정도로는 그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성의를 가다듬고 말을 꺼내야 하는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나마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으며, 그래도 담임이시지 않느냐는 미숙한 항의를 다시금 꺼내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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