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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일기

겹겹의 시간에 기대어

by 이은

산 너머로 해가 내려가고, 이내 하늘을 붉게 물들었다. 구석구석 다니며 몸에 익혔던 부석사를, 이제는 눈으로 한 번 더 담는다.

"가자, 이제."

내려오는 뒤로 삐그덕 끼익 소리를 내며 중생들의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의 회전문이 닫힌다. 그 소리와 함께 나의 지난 시간도 문을 닫는다. 그렇게 나의 애도의 시간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ㅡ<엄마가 되고 싶었던 날들> 중 '부석사에서'




궁금했다. 부석사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울었던 시간을 보내고, 작년엔 출판사 대표님과 찾은 부석사에서 좋다는 말을 이만 오천 번을 했다. 다시 남편과 함께 그곳을 찾는다면, 나는 과연 작년처럼 좋다는 말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시 또 와르르 무너져버릴까.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땅에 비친 나는 마치 3미터 장신처럼 길게 늘어져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는 건, 그만큼 해가 낮아졌다는 얘기. 서둘러야 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당간지주에서 한 번, 천왕문에서도 한 번, 범종각에서, 안양루에서 또 한 번씩 숨을 골랐다. 잠시 시선을 머무르거나 가볍게 합장을 하면서 마음으로 인사를 전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을 마주했을 때,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두른 만큼 몸에 열이 오른 거겠지. 부드러운 바람이 환영 인사를 하듯 살포시 나를 감싸고 지나갔다. 시원하다. 편안하다. 그리고 따뜻하다.


겹겹이 포개져 이어진 산그리메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눈앞이 온통 살구빛이다. 가장 선명한 살구빛을 지나 어느덧 하늘은 빠르게 채도를 잃어갔고, 선명하던 산그리메도 거대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아스라해지고 있었다. 마치 온몸으로 기억하려는 듯, 가만히 선 채로 그 순간을 마주했다. 알 수 있었다. 눈물로 지었던 나의 절은, 더는 여기에 없다는 걸.


"가자, 이제."


더는 운영되지 않는 매표소 자리를 지나오며 단풍 사이로 노랗게 밝혀진 가로등 빛을 보았다. 어느 날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바로 저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두었었다. 블로그의 첫 글로 남겼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던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의 나를 지나쳐 다시 현실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도 이곳에서의 시간들은 선명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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