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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소일기

열한 살 아가 루피, 그리고

by 이은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마침 그날은 루피의 올해 마지막 접종 날이었다. 근래의 루피는 좀 어떠냐 묻는 원장님께 특별한 건 없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산책 가자!"라는 말을 듣고 좋아는 하는데, 꼬리가 내려가 있고, 하네스를 채우려 했을 때 "낑-" 하며 아픈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가니 내려갔던 꼬리는 살랑거리며 흔들렸고, 냄새 잘 맡고, 똥도 잘 싸고, 그동안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너 싫어!" 하던 동네 웰시 친구 금순이와 어쩐 일로 인사도 곧잘 했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와 다시 또 꼬리는 내려가고 몸은 작게 말아 쭈구리가 되었다. 접종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길에도 아침 산책에서와 같이 꼬리는 살랑거리고, 냄새 잘 맡고, 쉬아도 잘 했으니. 왜인지는 알 수 없어도 기분이 좋지 않은가, 혹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간단하게 검진해 보고, 혹시라도 열이 높으면 접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열이 40도. 감기인 것 같다며 예정되어 있던 접종 대신 해열제와 항생제 주사를 맞고, 일주일 약을 먹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전날 저녁부터 재채기를 좀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미안해. 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지난 한 주. 루피는 매일 하루 세 번 산책을 하고(실외 배변이라 어쩔 수가 없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었다(투약 보조제 만세!). 40도의 고열에도 사료는 거부하지 않았고(그렇다고 잘 먹은 건 아니고), 열을 체크한다고 이틀에 한 번 나에게 응꼬를 내주어야만 했다(이렇게 우리 찡찡이가 순하다). 그리고 잤다. 자고 또 잤다. 산책하고, 밥 먹고, 약 먹고, 응꼬를 내주는 시간 말고는 거의 잤다고 해도 좋을 만큼.


나는 어땠던가. 산책을 하며 가급적 루피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평소와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하필 바람이 차가워질 때라 최대한 짧은 동선으로 다녔다(공원보다는 아파트 안팎으로). 그렇지 않아도 마른 아이가 더 살 빠지지 않게 사료를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 애썼고(털옷을 벗으면 뼈가 앙상하다), 열이 서서히 내려가면서 동시에 찡찡 데시벨이 커지는 걸 보며 안도했다(찡찡에 기뻐할 줄이야!). 산책 앞에서 흥분하지 않고, 퇴근하는 남편에게 짖으며 인사하지도 않고, 종일 잠만 자는 모습에 두려운 시간을 보냈다.


루피는 올해 열한 살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정확한 나이는 아니다. 루피의 추정 나이 두 살일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그날을 녀석의 생일로 여기며 아홉 해를 보냈다. 누군가는 열한 살을 노견이라고 말하더라만, 루피에게 노견 혹은 할아버지라는 수식어는 아직 어색하다. 할아버지 루피라니, 말도 안 돼. 아저씨… 까지는 뭐. 비록 처음 만났을 때보다 털색은 많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내 눈에는 아직 아가이기만 한 걸.


처방받은 일주일 치 약을 다 먹고, 어제 병원에 다녀왔다. 다행히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온 루피는 접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때보다도 길었던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보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한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들어왔고, 간호사 선생님과 몇 마디 나누더니 커다란 박스를 받아들고 병원을 나갔다. 열다섯 살 아이. 기저질환이 있었는데 집에서 쇼크가 왔고, 저체온증으로 병원을 급하게 찾았지만 치료 도중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커다란 박스를 안고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며칠 전 찡찡이 루피가 찡찡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두려웠던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 아픈 이별을 한 어느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알 수 없을 눈물이 차올랐다. 다시 떠올리는 지금도 마음 저 아래에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조용히 흔들린다.

그저 평안하기를.

슬픔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기원일지라도, 부디.



KakaoTalk_20251104_072043813.jpg 눈빛 마저 아팠던, 지난 주의 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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