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세리머니
원래 만나기로 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약속을 잡아 놓고 뒤늦게 집안 행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취소를 할지, 아니면 다음 날인 일요일로 약속을 미룰지 의견을 물었다. 상대의 의견을 묻기는 했지만 내심 취소하자는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적지 않았다. 출근 전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쉬고만 싶은 마음이 컸고, 무엇보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잡은 약속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바람과는 다르게 상대방 남자 쪽에서는 다음날로 약속을 미루자는 의견을 전해왔다. 여자의 사정으로 미루게 된 것이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약속 당일,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 교보문고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그날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 역시 일찍 도착했다는 얘기에 서둘러 약속 장소로 움직였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듯 한숨을 쉬었던 것도 같다.
소개팅이라니. 자고로 소개팅이라 함은 지극히 소모적인 만남이라 여기며 피해왔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던 여자가 누군가를 소개로 만나는 자리에 스스로 나가다니. 그때 여자는 일상이 조금 지루하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 없나 고민하던 차에 소개팅하겠냐는 말을 덥석 물었던 거다. 나이만 전해 듣고는 이름이 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집은 어디인지 등의 소개로 만날 때 궁금해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묻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고 빨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카페가 아닌 술집에서, 그것도 일요일 오후 1시로 시간을 잡았다. 심지어 그곳은 과거에 다른 남자와도 함께 갔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여자는 이 약속에 마음이 없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고 남자가 들어왔다. 흰 티에 청바지, 운동화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남자는 잘 웃었고 웃는 얼굴이 제법 귀엽기도 했다. 걱정과는 달리 얘기가 꽤나 잘 통했고, 여자의 사소한 얘기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에 방어적이기만 했던 여자의 마음은 조금씩 풀려갔다.
어느샌가 주선자는 빠지고 둘은 다음날 출근도 잊은 채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고, 마신 술의 양만큼 많은 얘기를 나눴다. 당시 여자는 차를 사고 싶어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여러 모델을 언급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마침 차를 바꾼 지 일주일이 채 안되었다며 자신이 기사가 되어줄 테니 차는 알아보지 말라고 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함께 가주겠노라고. 언제든 멈추고 싶으면 그곳이 어디든 차를 멈추고 즐길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했다. 남자는 그 약속을 정말 잘 지켜주었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고 13년이 지난 지금은 부부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살아가고 있다.
여자와 남자는. 우리는. 매년 처음 만났던 그날이 되면 마치 둘만의 세리머니(ceremony)처럼 처음 만났던 그곳엘 가고 있다. 세월이 쌓인 만큼 배 나온 아저씨와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 그곳에 갈 때면 마음만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듯한 마법을 경험한다.
수많은 가게가 생겨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요즘, 아직까지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켜주고 있는 그곳의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어쩐지 우리의 추억도 함께 지켜지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 부디 내년에도 그곳에서 그 시절의 우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