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40대
하얗게 또 눈이 내렸다.
사촌오빠의 머리가 빨리 셌던 걸 보면 아버지 쪽의 유전적인 요인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병원 다니면서 몇 년간 호르몬제를 인위적으로 때려 넣었으니 몸이 상해서 일 수도 있겠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유전적 요인에 외부적 요인이 결합되어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한 결과가 지금 내 상태겠지.
짧은 머리를 기를 때 흔히 '거지존'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새치도 마찬가지다. 멋내기 염색이라면 내 본연의 검은 머리가 올라와 자라는 걸 보며 버틸 테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기를 견뎌내면 검은 머리가 아닌 흰머리가 되는 거다. 해서, 그 시기를 넘기지 못하고 결국은 다시 염색을 하게 되는 거지. 내 두피에겐 미안하지만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반복되고 있는 악순환. 그래,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그나마 혹여 집에서 셀프로 하는 것보다 두피에 자극이 덜 될까 하는 마음에 전문가의 손길을 빌린다는 게 조금의 위로랄까.
한 번은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버텨보기도 했지만 문득 거울 속 내 모습에 한숨이 나와 버렸다. 정말 꼴 보기 싫었다. 평소의 나는 화장을 잘하지 않으니 맨 얼굴에 하얗게 센 머리의 내가 자연스러움을 넘어 추레해 보였다. 유난히 푸석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얼굴은 기분 탓이었을까. 속상했다. 나이에 맞게 하얗게 센 거라면 모를까, 아직은 젊은 사람이 흰머리를 그대로 두려면 얼굴엔 생기가 가득 돌아야 한다. 그래야 흰머리를 한 젊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 놀라움이나 안쓰러움을 걷어낼 수 있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 자신이 없는 걸 테지. 그때의 나는 마음이 한없이 구겨져 있었고, 구겨진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으며, 범위를 넓혀가는 흰머리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쉰이 되면 염색 없이 그냥 지내고 싶다고 다짐하듯 말을 해왔다. 쉰도 아직 젊은 나이지만 어쩐지 그때가 되면 내 흰머리에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같은 게 있다. 마치 정말 어른일 것 같은 스물을 기대하는 풋풋한 10대처럼, 인생을 다 알게 될 것 같은 서른을 기대하는 매일이 숙제 같았던 20대처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마흔을 기대하는 한 없이 흔들리던 30대처럼. 하늘의 명을 깨닫는다는 쉰, 지천명을 기대하고 있는 40대의 지금.
물론 알고 있다.
스물은 기대했던 어른이 아니었고, 서른에도 인생은 숙제 같았으며, 마흔에도 한없이 흔들린다는 것을. 때문에 쉰이 된다 해도 하늘의 뜻을 알기는커녕 당장 자라나는 흰머리 앞에 매 순간 괴롭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기대해 보련다. 지금보다 단단해질 내면의 땅을. 그 위에 흔들림 없이 서 있을 나를. 흰머리 따위 웃으며 바라볼 수 있는 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