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 이야기
아침 산책 후 들어오는 길에 만난 이웃분이 보아를 한참 보시더니 느닷없이 동네에 미용 잘하는 곳이 있다며 알려주었고, 동생이 키우는 강아지라며 마치 모델 같은 포즈로 앉아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말티즈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에도 보아를 보며 '얘는... 말티즈죠?'라고 물었고 비숑이라는 말에 '에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보이던 분.
당시 6개월이 채 안되었던 보아는 비숑치고는 체구가 작았고 아직 힘없는 솜털을 가진 아가였으며 비숑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털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새벽이슬을 가득 머금은 공원 잔디밭에서 뒹굴고 들어오는 길이었으니 누가 봐도 꼬질함의 극치였을 터.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아주 정성 들여 목욕을 시켰지. 지금이라면 웃어넘길 수 있었을 테지만 당시의 나는 조금은 작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목욕을 시키고, 털을 말리고, 빗질을 하는 내내 속이 상해 있었으니. 기분 좋게 산책하고 들어와 우다다까지 산책을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바로 욕조로 들어간 보아에게 그날 산책의 즐거운 기억은 다 사라지고 결국 하기 싫은 목욕만 남지는 않았을까.
두 살이 되기 전 한 번은 털을 빡빡 밀었던 적이 있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털도 하나도 남김없이. 처음 시작은 미용의 목적이었다. 당장은 볼품없어 보일지 몰라도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털에 힘이 생겨 조금만 자라도 반으로 갈라지는 털이 힘을 받고 설 수 있다는 얘기에 고민 없이 밀었던 거다. 그때의 나는 '어머 얘는 말티즈예요?'라는 말에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배냇 털이 빠지고 보아의 나이가 한 살이 넘어가면서 그 빈도는 줄었지만 산책을 나가면 열에 너 다섯 번은 보아의 견종에 대해 궁금함을 넘어 의문을 잔뜩 담은 질문을 들었으니. 어서 빨리 탐스럽고 빵빵한 머릿 털을 가진 비숑이 되기를 바랐다. 물론 그렇게 빡빡 밀고 나서 다시 풍성한 털을 갖기 전까지 얘는 말티즈냐 푸들이냐는 질문과, 비숑이라는 대답에 이쁜 애를 왜 그렇게 키우느냐는 타박을 담은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했지만.
그러나 막상 밀고 보니 애초에 가졌던 미용의 목적보다 더 큰 걸 얻게 되었다.
보아는 어릴 적부터 귓병이 심했다(지금은 아토피와 식이 알러지까지 있다). 안 그래도 털이 많은 강아지인데 유독 귓속 털이 많은 아이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생긴 귓병은 좋아지고 나빠지고를 수없이 반복했고(지금도 반복하고 있고) 본의 아니게 넥카라를 착용하는 날이 많아졌다. 넥카라 때문에 머리 털이 앞으로 쏠리게 되니 털은 짐이 될 뿐이었다. 날씨가 습하기라도 하면 귀는 더 탈이 나기가 쉽고 긁는 아이를 지켜보는 나의 안타까움과는 비교되지 않을 괴로움은 보아의 몫이다. 그런데 털을 밀고 나니 귓병이 덜 생기고, 넥카라를 해도 털 쏠림이 없어 회복도 빨랐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숑프리제의 이미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에 구름같이 희고 보송한 털로 뒤덮인 모습. 사실 나 역시 보아를 데려오면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며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 모습은 보아가 원하는 모습일까 와 보아의 건강을 위한 모습일까를 생각해보니 고민할 필요 없이 답이 바로 나왔다. 어느 강아지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자신의 털이 어떤 모양을 하건 신경 쓰는 강아지는 없다. 더구나 그 모습을 하기 위해서 수시로 엉킨 털을 풀어가며 빗질을 해야 하고, 적게나마 질병의 원인이 된다면 더더욱. 해서, 이후 적당히 동그란 모습은 유지하지만 과도하게 털을 기르지는 않고 있다.
요즘 보아는 습한 날씨와 아토피 때문에 또 귀밑을 긁어 상처를 내 약을 바르며 결국 넥카라를 하고 있다. 상처가 조금 아물게 되면 이번 주말 다시 한번 털을 짧게 잘라 줄 생각이다. 산책할 때 만나는 분들은 또 한 마디씩 거들겠지만 알게 뭐람. 보아는 그분들을 위해서가 아닌 보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덥고 습한 날씨에 피부 알러지와 귓병과 넥카라와 싸울 바엔 짧게 자르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