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 이야기
2016년 6월. 세 번째 유산을 했을 때였다.
힘들어하는 내게 강아지를 데려오는 게 어떻겠냐고 남편이 먼저 제안을 했다. 집에서 새우를 키우며 방 하나를 어항으로 가득 채워 나름의 힐링 스팟을 갖고 있던 본인처럼 내게도 그런 존재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을 터. 그 말을 듣고 홀린 듯 사이트를 뒤져가며 유기견을 찾다가 보게 된 아이가 바로 루피다.
[1살 추정 / 푸들 / 수컷 / 중성화 무]
공고 내용은 이게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직접 찾아가서 만난 녀석은 사진에서 보다 더 겁에 질린 눈빛이었다. 1살 추정이라는 공고와는 달리 2살 정도로 보인다고 했고, 길에서 흔히 보이는 푸들보다 다리가 길고 컸다. 비쩍 마른 몸에 겁에 질린 눈을 가진 녀석은 낑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내가 안으니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몸을 맡겼다. 바로 입양할 생각 없이 그저 한 번 보러 오라는 말에 갔을 뿐인데 도저히 내려두고 올 수가 없었다. 고민할 것 없이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 / The Patience Stone]을 보면 식물인간 남편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에게 남편은 바로 인내의 돌. 인내의 돌이란 비밀을 털어놓으면 이야기한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마법의 돌인데, 어느 날 돌은 부서지고 돌에게 비밀을 털어놓던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당시의 나는 아이나 임산부를 보기만 해도, 밥을 먹다가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눈물이 날 만큼 정신적으로 힘이 든 시기였다. 수술하고 일주일도 채 안 된 시기라 내 몸은 너무 힘들고 맘은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눈앞에 있는 커다란 녀석이 안쓰러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충동적인 선택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후회를 했고, 후회를 한 만큼 녀석에게 미안했다. 기껏 데려온 아이에게 순수하게 애정만 주지 못하는 내가 쓰레기 같았으며 혹여 누군가에게 이런 내 마음을 들킬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을 붙잡고 얘기를 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차마 꺼내지 못하는 얘기들을 녀석에게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너는 왜 말을 하지 못하니.' 다소 뜬금없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알고 있었다. 오히려 말을 하지 못하니 내 얘기를 할 수 있었다는 걸. 그렇게 루피는 나에게 인내의 돌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두 살에 만난 루피가 여덟 살이 되었다. 그동안 몇 번의 이벤트는 있었지만 아직 타인이나 낯선 환경에 대한 경계가 다소 심할 뿐 손이 많이 가는 아이가 아닌데 작년부터 한 번씩 예고 없이 병원에 가는 일이 생기고 있다. 아직 십 년은 거뜬히 곁에 있을 거라고 믿지만 한편으로는 죽고 사는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답이 없는 문제이니 고민과 걱정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서로 마음이 힘들 때 가족이 된 아이다. 농담처럼 내게 너무 집착한다고 타박하지만 사실은 이 작은 녀석에게 내가 더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부디 부서지지 않기를. 내 옆자리는 언제든 내어줄 테니 오랫동안 그냥 이대로 있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