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크리스마스
시가는 40년은 훌쩍 넘은 오래된 구옥이다. 넓은 마당은 없지만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공간이 마당이 되어 각종 장이 담긴 항아리와 대형 꽃 화분은 물론, 여느 텃밭 부럽지 않은 재배용 화분이 가득하다. 매년 가지, 오이, 호박, 고추는 물론 상추, 깻잎, 토마토도 가득 열린다. 필요할 때 바로 따 드시고, 이따금 시가에 갈 때면 바로 따서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하셨지.
그곳은 시아버지 담당이었다. 아침이면 물을 주셨고, 혹시라도 벌레가 생기진 않았나 살피는 것도, 겨울이 다가오면 화분들을 보일러실로 옮기는 것도 늘 시아버지의 몫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계실 때도 '물 줘야 하는데,... 손 봐야 하는데,...' 걱정을 하실 정도였으니.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아시는 시어머니는 '아빠 돌아가시면 난 절대 안 한다'하셨지만 결국 시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모종을 심으시고, 아침마다 물을 주시고, 혹여 벌레라도 생기지 않을까 보고 또 보고 계신다.
어려서부터 그런 걸 보고 자란 남편에게는 모종을 사다 심고 재배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혼 후 처음 몇 년을 제외하고는 매 봄마다 화원을 가고, 모종을 사고, 베란다 구석에 혼자 앉아 열심히 심는다. '내년엔 안 할 거야'라고 말은 하지만 해가 바뀌고 그가 말했던 내년이 되면 다시 또 화원을 가는 일로 그의 봄이 시작된다. 매일 아침 흙 상태를 살펴 가며 물을 주고, 벌레가 생기지 않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 아이처럼 좋아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속상해한다. 시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모든 건 그의 몫이다.
아무리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여도 창을 한 번 거쳐서 들어오는 볕이다 보니 밖에서 키우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늘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올해는 처음으로 창밖으로 화분을 내놨는데, 역시! 텃밭에서 자라는 것처럼 상추 잎이 짱짱하다. 출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아침마다 물을 주며 상태를 살펴 준 덕에 마트에 가지 않아도 필요할 때 언제든 신선한 상추를 따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텃밭 상추에 꽃대가 올라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말 그대로다. 베란다 텃밭에서 키우는 상추에 꽃대가 올라온 거다. 올해 텃밭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꽃상추가 얼마 전부터 잎이 커지지는 않고 위로만 자라더니 결국 꽃을 피우려 꽃대가 올라왔다. 나야 그저 야금야금 따서 먹기만 했을 뿐인데도 훌쩍 커서 꽃 피울 준비를 하는 상추를 보니 마치 다 커버린 자식을 보는 것처럼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잘 자랐다는 얘기일 테니 기특하기도 하다.
비 소식이 있어 하늘은 흐리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 창밖의 상추에 불을 켜주고 싶어졌다. 쭉 뻗은 상추 줄기에 꼬마전구를 달았더니 마치 구름에 가려진 별이 창가에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라면서 맛있는 상추도 얻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6월의 크리스마스도 선물 받았다. 비록 대기는 습기로 가득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보송해졌다. 어쩐지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