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배달부 하루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를 읽은 후 마음이 바닥에서 1cm가량 떠 있는 기분이었다. 보통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루 정도는 여운을 느끼며 공백을 갖곤 하는데 이번엔 도통 다른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 어쩐지 과거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책장을 살펴보다 하루키, 그 가운데 「상실의 시대」에서 시선이 멈췄다. 머릿속 환기를 위해 무언가 짧고 가볍게 읽으려던 생각이었기에 상실의 시대는 그 계획에 맞지 않았다. 머물렀던 시선을 애써 거두고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어쩐지 계속 한쪽 끝을 잡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기어코 꺼내 들었다.
첫 장을 펼쳤다.
하.
까맣게 잊고 있던 선물이 거기 있었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한다.
네 안의 뜨거운 '그것'을 모두 글로 담을 수 있는 글쟁이가 되길 바라구.
정말 가슴 저리며 머리가 멍해져 올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내 맘을 받아주길 바라구.
다시 한번 축하한다.
2000. 10. 19
이 책은 C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4월부터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뭐라도 쓴다. 그동안 꾸준히 써 왔던 감사일기가 되기도 하고, 밥상머리 일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혼잣말 같은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매일 글쓰기를 하도록 내 등을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 준 사람이 바로 C다. 매일 글쓰기에 참여할 수 있게 알려 주었고, 브런치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톡톡 건드려 주었다. 그런 친구에게서 무려 22년 전에 받은 책에 '글쟁이'가 되길 바란다는 편지라니. 놀랍지 않은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느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10년. 그 시기에 곁에서 나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해 안타깝다 말을 하지만 결국 뭐라도 쓰면서 이겨낼 수 있게 꽤 오래전부터 응원을 받았고 덕분에 버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받고 있다는 생각에 벅차올랐다.
가볍게 읽으려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천천히 완독 후 첫 장을 펼쳐 C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실의 시대가 책장에서 유난히 내 시선을 잡아끌었던 건 이렇게 늘 응원받고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쩐지 저 아래 기억의 창고에서 먼지가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배달받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