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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an 26. 2023

사고는 액땜이 아니라 천운이었다

엄마의 사고

기필코 늦잠을 자겠다는 작지만 원대한 다짐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밤이다. 불을 끄고 남편은 3분을 채 넘기지 못한 채 가볍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 역시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탓에 피곤했고, 이젠 정말 자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장 낮은 밝기로 보던 핸드폰도 내려놓은 지 10분쯤 지났을 무렵.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엄마다.


청춘의 밤엔 늦은 시간 걸려오는 전화가 설레임을 주었다면, 이제는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떨림이 있다. 그 떨림은 아무리 애써도 예쁘게 포장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게 만드니까. 더구나 발신인이 부모님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예감은 높은 확률로 요리조리 잘 피해 가지만, 어쩜 그렇게 슬픈 예감은 과녁에 꽂히는 확률이 높은 것일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다쳤다, 피가 난다, 119에 전화하려는데 잘 안 된다' 이런 얘기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를 재차 물었더니 엄마는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본 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119에 출동 요청을 했고, 뒤이어 오빠에게 사실을 알렸다. 엄마를 최대한 안심시키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병원을 향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명절 당일 온 가족이 만나 기분 좋게 밥 먹고 점심즈음 헤어졌다. 시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마지막 통화를 하고 불과 3시간 남짓 지났을 뿐이다.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저녁에 기분 좋게 술 한잔한 오빠와 올케언니는 운전을 할 수가 없었고, 어차피 병원엔 보호자가 여럿이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병원에 오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남편은 두고 혼자 집을 나섰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부순환로를 빠져나와 병원에 가까워졌을 때, 저 뒤에서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 안엔 또 어떤 환자가 누워있을까. 엄마도 이렇게 이 길을 지나갔겠지. 때로는 누구보다 대범하지만 사실은 겁이 많은 엄마가 몹시도 걱정되었다. 신호 앞에 멈춰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눈으로 확인한 엄마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굴에 범벅이었던 피는 닦였지만 상처는 아직 지혈되지 않은 채였고,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은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주고 있었으니. 다리가 풀릴 정도로 놀랐지만 눈앞에서 떨고 있는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늦은 밤. 쉴 새 없이 울리는 호출 소리와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소리,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의료진들의 모습에 응급실은 정신이 없지만 나와 엄마가 있는 곳은 마치 그곳에서 분리된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 시간 반복된 대기와 검사 끝에 해가 뜨기 전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미주신경성 실신으로 인한 상처가 굉장히 크고 깊지만 다행히 다른 이상 소견은 없다. 외과적 치료가 필요할 테지만 봉합한 상처 치료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니 이만하면 다행이라 여겨본다.


정초 액땜은 돈 주고도 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하고 우리 가족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니, 사실 엄마의 사고는 정초 액땜으로 치부하기엔 부족하다. 사고를 마주하고 만났던 많은 의사들과 관계자들의 말처럼 이번 사고는 천운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새삼 많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비록 사고는 벌어졌지만 쓰러진 이후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정신을 차려 준 엄마에게 감사하고, 빠르게 출동해 준 119 구급 대원들께 감사하다. 옆에 살지는 않지만 이렇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어 감사하고, 사고로 인한 상처는 매우 크지만 그 외 다른 이상은 없으니 정말 너무나 감사하다. 무엇보다 다시는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두려웠던 마음을 과거로 남겨둘 수 있어 이보다 더 감사할 수가 없다.


덕분에 이렇게 부모님을 향한 애정을 가득 담은 잔소리가 하나 늘었다.


"앉았다 일어나실 때 스트레칭부터 하세요"




 

제주도 여행에서, 엄마의 점프샷




*이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 분야에 기사로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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