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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an 20. 2023

명절 음식 이렇게 하면 조금은 편할거예요

시어머니와 함께 역할 나누기

이제는 며느리 경력 14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시어머니가 친정엄마와는 또 다르게 편해졌다. 명절이 다가오면 생각만으로도 소화가 안 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며느리들을 떠올리면 나는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가(이걸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 자체가 어쩐지 조금 억울하지만).


물론 처음부터 시어머니가 편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수는 없지 않겠나. 서로 쌓아온 시간이 있다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거기엔 까다롭지 않은 시어머니의 성격이 매우 큰 몫을 했을 테고.


나의 시어머니 윤 여사님. 맏며느리는 아니지만 맏며느리의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하며 사신 분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들을 건사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은 모두 너무나 자연스레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래서인가 명절엔 당일에 먹는 양보다 각자의 집으로 들려 보내는 음식의 양이 몇 배는 더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힘들지만 당연한 일로 여기며 살아오셨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하신다는 건 내 몫도 같이 커진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명절을 앞두고 힘들었던 건 처음 한두 해가 전부였다. 처음엔 음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울기도 했다. 그런데 머리를 싸매고 누워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아니고 일 년에 딱 두 번이다. 그러니 기꺼이 하자'라고.


결혼 전에는 해보지 않은 거라 잘 모른다고 내 패를 보였고, 가르쳐 주시면 배우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그랬더니 내게 갖는 기대치를 낮춰 주시고, 나 또한 마음을 바꿔서인지 아침부터 종일 맡는 기름 냄새가 처음만큼 견디기 힘들지 않았다. 쭈그려 앉은 자세가 불편하긴 해도 괴롭지는 않았다. 산처럼 쌓이는 설거지를 하고나면 오히려 개운한 기분마저 느끼게 되었다. 어느 명절,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를 반복하다 앉은 내게 달콤한 식혜 한 잔을 건네시며 '나중에 나 없으면 이런 거 하지 마'라고 하셨던 적이 있다. 시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어쩌면 견딜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는 더 이상 명절에 음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모태신앙을 가진 시어머니는 그렇지 않은 시아버지와의 타협점으로 차례는 지내지 않지만 차례상은 차리고 계셨던 거다.


이제는 시아버지가 안 계시니 차례를 지낼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첫 명절이 되었을 때엔 당신의 선언처럼 음식을 하는 대신 시아버지를 모신 곳에서 하루 숙박을 하고 아침에 남이 차려주는 조식도 드셨다. 지금껏과는 전혀 다른 명절을 보내는 아침. 시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티비를 보다가 내가 물었다.


"음식 안 하시니까 어때요? 여기 아버님 계신 곳에 오니까 좋으세요?"

"여기 오니까 좋기는 한데 이상해. 음식을 안 하니 명절 같지도 않고 허전해. 넌 어때?"

"음식 안 하니까 좋죠. 그런데 저도 이상하게 허전해요."

"10년을 하고 안 하는 너도 허전한데, 40년을 넘게 한 나는 오죽하겠니. 호호호."


그리고 그다음 명절부터 우리는 다시 음식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처럼 차례상을 차리지는 않으니 음식은 자연스레 간소화되었고, 그러다 보니 명절을 보내며 숙명처럼 느꼈던 심적부담과 육체적 피로도는 줄어들었다. 거기에 하나 더.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추석엔 잡채나 갈비를, 설에는 만두를 내가 담당하고 시어머니는 그 외 모든 것을 하신다. 아무리 가짓수를 줄이고 양을 줄인다 해도 그게 만만치 않을 테지만 그동안 쌓아온 내공이 있어서인지 이 정도는 놀면서 하는 거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또 설이 되었고 여느 때처럼 나는 만두를 만든다. 이번엔 친정에 먼저 가게 되어 친정 식구들과 먹을 것도 함께.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는 약속이라도 하신 듯 먹을 만큼 조금만 하라고 하셨지만 그게 그렇게 되나. 하다 보면 양가에서 당일에 먹을 정도의 양은 물론이거니와 시누이네 싸서 보낼 만큼과 명절이 지나고 우리가 또 먹을 것을 하다 보면 100개는 족히 채우고도 남겠지. 이런 나를 보면 남편은 말할 거다. '김 여사님 딸, 윤 여사님 며느리 맞네.'


만두 속을 채울 재료를 사러 마트에 가다가 문득, 명절을 앞두고 시어머니께 연락을 드리지 않은 게 떠올라 그 자리에 서서 바로 전화를 드렸다.


"뭐 하고 계세요? 음식은 뭐 하실 거예요?"

"시장에 갔는데 우엉이 싸길래 사 와서 썰고 있어. 간단하게 녹두전이나 하지 뭐. 갈비도 사다 놨어. 게장도 하려고. 잡채는 안 할까 봐."

"그래요. 잡채는 손 많이 가니까 하지 마요. 게장은 좋네. 제발 쉬엄쉬엄 하세요. 집에 갈비 들어왔는데 제가 할 걸 그랬나 봐요. 만두는 해갈게요."


이렇게 다시 명절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 며느리들이 지난 명절보다는 조금은 덜 힘들기를. 그리고 부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바라본다.



지난 설에 빚은 만두



*해당 글은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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