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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Jan 31. 2023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욕심

불고기덮밥

월말이 되면 장을 보기 보다는 가급적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활용하려 한다. 월말이라고 다르고 월초라고 또 다른 건 아니지만 주부 생활을 하는 내가 갖는 하나의 월말 루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냉동실을 가만 살펴보다 대형마트에서 사다가 1인분씩 소분해 놓은 양념 불고기가 눈에 띄었다. 먹고 싶을 때 꺼내 채소와 약간의 양념을 더해 볶아만 주면 되는, 불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상시 준비 메뉴이다.


아침 산책을 나서기 전 남편은 모든 게 다 있다는 생활용품 점에 잠시 들리자며 지갑을 챙기고 필요한 물품 리스트를 정리한다. 건전지를 비롯해 홈가드닝 등 집안일 중 그의 영역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들이다. 매장은 산책 코스에 위치해 있지만 반려견은 입장할 수 없으니 나와 똥강아지들은 그가 매장에 들어가 계산을 하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곤 한다.


바람이 한결 약해졌다 해도 이번 겨울 최강한파라고 할 정도로 추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한자리에 서 있는 것은 걸으며 움직이는 것보다 체감 온도가 더 떨어지는 듯하다. 평소 그곳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장 안을 누비며 구경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10분쯤 지났을까. 두꺼운 외투를 입었으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내 마음속은 조금씩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 참기를 반복하던 중 멀리 이층에서 내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더웠는지 입고 들어간 패딩 점퍼의 지퍼를 열고 있는 모습이다. 아마 그 모습이었나 보다. 마음속에 불던 모래바람을 태풍으로 바꿔 놓은 것이. 셀프 계산대로 가더니 밖을 빼꼼 쳐다본다. 센서에 반응한 문이 열리니 작은 똥강아지가 문 너머의 그를 발견하고는 흥분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속 태풍을 알리 없는 그가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뭐 해! 추워! 얼른 계산하고 나오라고!"


바람이 차게 불고 있는 밖으로 나오면서 지퍼도 채 잠그지 못한 그가 쭈뼛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아 그걸 찾아보느라 늦었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불과 1분 전의 나를 후회했다. 아니, 후회는 입 밖으로 소리가 나가는 동시에 밀려왔다. 머쓱해서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화가 나면 혀 끝에 칼을 달게 된다. 그렇게 칼을 휘두르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나? 아니. 오히려 그 칼은 결국 내게로 향해 내 마음이 상처를 입는다. 때문에 화가 날 때는 일단 심호흡을 하고 말을 아끼곤 하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물론 1분 전의 내가 화를 낸 게 칼을 휘둘렀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과장이 있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 화부터 낸 것은 사실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입장에선 원하는 물건을 찾느라 이리저리 다니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 거였고, 계산하러 내려왔을 때 문 밖의 나와 똥강아지들을 보고 반가워 빼꼼 내다보며 웃었을 뿐이었을 텐데 말이다.


집에 들어와 서둘러 새 밥을 짓고 그 사이 팬에 불고기와 채소를 넣는다. 냉동실 한 자리를 차지하던 불고기를 이른 점심 메뉴로 먹으려 지난밤 냉장실로 옮겨두었던 참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오늘의 불고기는 갓 지은 밥과 함께 성급하게 화를 냈던 나의 사과가 담긴 한 그릇이 되었다.


"어때, 괜찮아?"

"응. 맛있어."

"아까 내가 화내서 기분 상했지?"

"아이고, 무슨."

"미안해서."

"뭐, 그런 걸..."


불편한 마음은 내내 갖고 갈 필요가 없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내 마음을 나조차도 모르는 순간들이 많은데 하물며 내가 아닌 사람이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 않을까. 그게 가족이어도 말이다.


감사한 마음일수록, 미안한 마음일수록 표현하자.

그게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


딱 한 입 거리가 남아도 배가 부르면 숟가락을 놓는 남편이 배부르다면서도 남김없이 싹싹 다 먹는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얹은 덮밥에 사과의 마음을 담았고, 그는 한 톨 남김없이 다 먹는 것으로 그런 나의 마음을 받아 주었다. 우리의 불편했던 마음은 그렇게 꼭꼭 씹어서 넘겨 말끔하게 소화시키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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