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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r 15. 2023

굿바이, 우리의 원피스 선생님

원피스 남매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

내 똥강아지들 루피와 보아는 만화 원피스의 등장인물 속 이름을 따왔다. 루피는 주인공이고 보아는 수많은 인물들 중 하나이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똥강아지들이 갖고 있는 이름의 비하인드를 다 알지 못한다. 뭐, 알 필요도 없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미취학 아동부터 중학생까지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 세대는 루피는 뽀로로의 친구로, 그리고 보아는 열에 아홉은 가수로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을 테지.


그런 루피와 보아가 어쩌다 루피와 보아가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차린 사람이 지금껏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지금 다니는 동물병원의 부원장님이었다. 혹시 만화 원피스의 캐릭터 이름인지를 묻던 수줍은 눈빛과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해맑게 웃던 얼굴을 아직 기억한다.


지난달 보아의 고질적인 귓병으로 진료를 보던 날이었다. 유난히 꼼꼼하게 봐주신다고 느끼던 찰나, 어려운 얘기를 꺼내야겠다며 조금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고 집안 사정상 집안일에 몰두해야 할 것 같다고 했지. 과거 언젠가 혹여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거나 개원을 하게 된다면 꼭 얘기해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게 들었던 그 말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나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과잉진료가 없었고, 전문 병원을 가야 하는 경우에도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접근성을 고려해 가장 적합한 병원을 알아봐 주었다. 나의 걱정과 의견을 늘 적극적으로 들어주었고, 복용해야 하는 약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제조사에 직접 확인해 주기도 했으며, 보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원을 가는 일이 적은 루피의 안부를 늘 물어 주었다. 한 번은 오랜 고민 끝에 보아의 알레르기 검사를 했는데 결과를 주면서 만화 원피스가 그려져 있는 파일을 준비하려 했으나 동네 문구점에서는 찾질 못했다며, 아쉬운 대로 '소녀 보아'에게 어울리는 핑크색 파일을 마련해 건네주었던 적이 있었다.


루피도 그렇지만 특히 보아는 처음 가족이 되면서부터 주치의가 되어주었다. 더구나 아토피에 식이 알레르기와 고관절 문제 등 워낙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아이라 그런지 병력을 다 알고 있는 분이라 편하기도 했다. 선생님 또한 그런 보아가 계속 마음이 쓰이고, 더 오래 보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하던 눈빛과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져 주책맞게 눈물이 차올랐다. 아, 마스크로 눈까지 가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나이가 되어도 헤어짐은 이렇듯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언젠가 보아의 고관절에 문제가 있어 당장은 아니어도 결국은 수술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서부권에서 굉장히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몇 달간 병원에 다니면서 그 의사의 수술하는 기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환자인 강아지와 보호자를 대하는 마음에 과연 진심이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쌓여갔다. 결국 당장 수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수술만 잘하는 기술자를 만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해당 병원에 발길을 끊은 경험이 있다. 수술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렵게 찾아온 보호자들을 철저한 갑의 위치에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윽박지르고 울리는 모습을 수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오진도 있었고 그렇게 신뢰를 잃은 그곳을 더 이상 찾을 이유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열광했던 이유에는 대본이 재미있고 연출이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서이기도 했겠지만,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의 모습이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웠다는 것도 큰 몫을 차지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서부권의 그 유명한 의사는 현실에서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기술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루피와 보아의 주치의인 부원장님은 감사하게도 거의 판타지에 가깝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선생님과의 마지막 진료인 아토피 주사를 맞는 날은 일부러 주말로 예약을 잡고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아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루피와 보아의 접종 시기 및 지난 검진 결과를 바탕으로 다가올 검진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주었다. 긴 시간 동안 마치 전체 맵을 그려주듯 하나씩 하나씩 꼼꼼하게 말이지. 더불어 이제 9살에 접어든 루피의 시간이 앞으로 더 빠르게 흘러갈 것이니 그에 따라 어떤 관리를 해야 할 것인지와 종합병원 같은 보아에게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처럼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적어도 루피와 보아를 대하는 모습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헤어짐은 못내 아쉽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그분의 앞길에 안녕을 기원한다.


"그동안 원피스 남매, 루피와 보아의 다정한 주치의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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