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Mar 10. 2023

헤어질 결심을 하고 새롭게 안녕을 말하다

내적 친밀감에서 비롯된

너도나도 일촌이었던 싸이월드가 다시 열리면서 누군가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고 말을 하더라만 적어도 내게는 보물창고가 열린 것 같았다. 분기별로 다니던 여행, 사랑하는 조카들의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땐 뭐가 그리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던지 약간의 과장을 더해 오만육천칠백 장의 사진이 그곳에 있었다.


싸이월드의 사진첩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지난 사진 속의 내가 낯설다. 언젠가 S의 아들 만두가 어릴 적 엄마아빠의 웨딩 사진을 보고서 아빠는 한 번에 알아봤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처럼 분명 내 사진이 맞는데 이상하게 낯선 여자가 웃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언제나 스커트에 힐을 신고 다녔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스커트와 기본 6cm 이따금 8cm 높이의 힐을 신었고, 쉬는 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라인과 마스카라 등 힘이 바짝 들어간 아이 메이크업은 기본값이었으며 손끝엔 늘 색이 칠해져 있었던 시절. 악세사리는 뭐, 말해 뭐 해.


그랬던 나와 멀어진 건 아마도 회사를 그만두고 지긋지긋한 난임전(戰)에 뛰어들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성분을 비교해 가며 유해하지 않은 제품을 사용했고, 그러다 보니 화장품의 종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눈물바람으로 다녔던 날들에 단계별 메이크업과 이런저런 악세사리는 사치였다. 겉모습을 꾸미는 것보다는 몸속을 돌보는 일이 더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어떤 영양제가 좋은지, 어떤 음식이 좋은지 등에 신경을 쓰기에도 모자랐으니.


그렇게 비우게 된 화장품은 다시 채워지지 않으면서 옷의 스타일도 바뀌게 되었다. 자연스레 편한 옷과 편한 신발을 찾게 되었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가 다 뭐야, 이제는 선크림도 겨우 바르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게다가 가장 즐겨 입는 옷은 레깅스와 츄리닝 그리고 청바지가 되었다. 구두가 가득하던 신발장에 이제는 운동화와 낮은 단화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방은 뭐니 뭐니 해도 가벼운 에코백이 최고다. 암만, 그렇고 말고. (혹여 아이라인을 하고 에코백을 들지 않은 저를 보셨다면, 그날의 저는 최선을 다해 꾸민 거랍니다)


내 몸에 딱 맞게 무릎이 나온 츄리닝이 주는 안정감을 아는지. 그 맛을 한 번 들이니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물론 이따금 신경 써서 입을 때도 있으나 H라인 스커트를 일상복으로 입고, 높은 힐을 신은채 뛰어다니고, 여러 가방을 두고 골라 들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일부러 작정을 하고 변화한 것이 아니라 이따금 화장대나 옷장이나 신발장을 보고 한숨을 쉬던 때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지금이 편하고 좋다. 편해서 좋은 건지, 좋아서 편해진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피부에 대한 고민은 좀 생겼다. 중년의 피부를 지키기엔 세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젊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중력의 힘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니 어쩌면 중년은 중력을 피부로도 느끼는 나이라는 뜻도 있... 응? 


며칠 전 피부톤만 봐도 부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말해 돈만 있으면 매끈하고 맑은 피부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겠지. 돈에 하나를 더 붙여본다면 시간이 되려나. 아니면 에너지인가. 아, 그게 뭐든 피부관리에 쏟을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일 테다. 돈의 여유, 시간의 여유, 열정의 여유 등. 거기에는 귀차니즘은 발도 붙일 수가 없다. 팩이라도 해야할 텐데 이거야 원. 아직 늦지 않았겠... 지.


가뭄에 콩 나듯 구두(차마 힐이라고는 말하지 못할)를 신고 외출을 하고는 한 이틀 불편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 시절 높은 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던 여자는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그럼 난 그런 여자는 모르는 여자라고 대답을 하지만 사실 그 여자도 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여자도 나다. 그러니 다시 만날 수 없는 싸이월드가 불러온 과거의 그녀와는 잘 헤어지고, 거울 앞에 이 여자, 지금의 나와 지금처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기로. 



오래전, 홍대 신발 매장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다 보면 '이건 마치 내 얘기인데?'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상대방은 알 수 없을 테지만 나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이 극도로 상승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은 엊그제 그렇게 시작된 나만의 내적 친밀감이 불러온 글이라는 수줍을 고백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