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을 가리지 않아 오히려 낯선
동네에 고양이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새로운' 고양이가 나타났다.
녀석을 처음 만난 날은 한참 추운 겨울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볍게 맥주 한 잔 마시고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오는 길에 노란 치즈냥이가 보였다. '처음 보는 녀석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이 다가와 애옹거리며 몸을 부비더니 차가운 바닥에 누워 배를 보이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아파트 후문에서부터 우리 집이 있는 동까지 50m는 족히 되는 거리를 따라왔다.
'미안해. 줄 게 없어. 우리 집에 함께 갈 수도 없어.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이 다니니 위험해. 다른 곳으로 가'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이걸 어쩌나. 남편을 붙잡고 발을 동동 거리는 와중에 고양이는 사라져버렸고, 나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녀석은 이후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아파트 후문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 녀석은 new 이면서도 strange 한, 낯을 가리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낯선 그런 고양이다. 누가 봐도 사람 손을 제대로 탄. 고양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집에서 사람과 함께 살던 아이일 것 같은 느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양이는, 더구나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는 사람을 보면 쌩하니 도망가거나 아니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라보기 일쑤인데, 이 녀석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멀리서 보고 있다가 사람이 보이면 마치 기다리고 있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달려와 애옹애옹하며 몸을 부빈다. 그렇다고 나만 바라보는 건 아니다. 내게 한참 몸을 부비다가도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관심을 보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쪽으로 가 다시 또 몸을 부비고 애옹애옹 한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녀석에게 발목 잡혀 '나, 가야 해~'라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다른 쪽으로 가버리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무슨 심보인지.
너 가버린 대도 괜찮아. 나 좋다는 인간들이 널렸음.
이라고 선우정아가 노래했던가.
정말 녀석의 마음이 딱 이럴지도 모르겠다. 다시 들어보니 이 곡이 딱 이 녀석을 대변해 줄 만한 곡이었구나.
어느 날엔 '양이야~'라고 부르고, 어느 날엔 '치즈야~'라고 부르고, 또 어느 날엔 '삐용아~'라고 부른다. 그럼 녀석은 자신이 무어라 불려도 상관없다는 듯 어떤 이름에도 애옹애옹 대답을 한다. 그 대답에 난 또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홀린 듯이 그 애교를 받고 있을 수밖에 없다. 녀석에게 난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둘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말이지.
오랜만에 동네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나가는 길에 여느 때처럼 후문을 지키고 있는 녀석을 만났다. 여전히 몸을 밀착시키고, 비비고, 애옹애옹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우리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알고 보니 다행히 상가 사장님들 몇 분이 이렇게 저렇게 돌보고 있다고 했고, 후문과 가까운 동에서는 화단 구석에 녀석의 보금자리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애정을 보이는 만큼 못지않은 마음을 받고 있는 녀석. 밀어내지 않고 보듬어주는 사람들이 감사하다.
언젠가부터 후문으로 나갈 때마다 녀석을 찾느라 내 눈이 바빠진다. 나타나지 않는 날엔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다. 그리고 서운한 마음은 이내 걱정으로 바뀌곤 한다.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쏙 빼갔던 고양이가 사라졌다.
애정이 넘치는 양이가, 치즈가, 삐용이가 요 며칠 통 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래. 추운 겨울 잘 버텼으니 따뜻한 봄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그저 더 많은 애정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기를, 어딘가에서 또 누군가에게 몸을 비비며 애옹애옹 하고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아니, 그보다 나와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 오늘이라도 ‘나 여기있지롱 애옹애옹’하고 다시 나타나주기를 기대한다. 너 주려고 츄르도 샀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