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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pr 27. 2023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하나의 음식

김밥

TV 예능 프로그램 때문인지 요즘은 유난히 분식을 자주 먹게 되는 것 같다. 주말에 남편과 함께 산책을 할 때면 혼자서는 가지 않을 방향으로 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꼭 핫도그 가게를 거치는 코스가 된다. 그리고는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들리듯 핫도그 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방송에 홀려 핫도그에 빠진 사람들이 또 있는지 여기가 이렇게나 맛집이었나 싶을 정도로 주문 후 기다리는 동안 쉴 새 없이 배달 주문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그 맛이 왜 그리도 생각나는 건지. 주말엔 핫도그라면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찾게 되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김밥이다.


정해진 재료는 없다. 그냥 그날그날 있는 재료를 넣고 말아주면 그뿐. 어느 날은 나물을 넣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반찬하려고 사다 놓은 어묵을 맵게 볶아 넣기도 하고, 어느 날은 쌀국수를 먹고 남은 고수를 넣기도 하는 식으로.


과거 어느 방송에서 평생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무얼 먹겠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방송을 보면서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엔 김밥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김밥엔 김과 밥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재료가 들어있다. 말아서 먹으면 김밥이 되는 거고, 비벼서 먹으면 비빔밥이 되는 거니까 김밥 하나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할 테니 꽤 괜찮은 선택이지 않을까.


지금이야 아이들 소풍 도시락에 각종 캐릭터가 가득하고 화려해졌지만, 내 어릴 적 소풍 도시락은 그저 김밥이면 충분했다. 소풍 가는 날이면 엄마는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을 싸주셨다. 도시락으로 가져갈 거였으면서도 김밥의 꼬다리는 야무지게도 집어 먹었더랬지. 그때는 꼬다리 맛이 좋은 건 그저 기분 탓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안다. 꼬다리엔 속 재료가 유난히 많이 들어있어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김밥은 꼬다리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김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고 적고 나니 잊고 있던 오래전 직장 동료가 기억의 저기 저 먼 곳에서 손을 번쩍 들고 나타났다. 이름까지 생각나버렸다. 미라. 성이 뭐였더라. 전이었나, 진이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한 성이었던 것 같다. 이목구비가 정말 예뻤는데 자신이 예쁜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이 더 예뻐 보였던 사람. 미소는 소년 같았고, 이따금 보이는 수줍은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사람.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이따금 하나씩 빼달라는 경우를 보곤 한다. 이를테면 익은 당근이나 오이, 단무지나 햄 등을 싫어해 빼는 경우 말이다. 그런데 그 직장 동료는 다른 재료가 아닌 바로 김을 싫어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김밥으로 먹을 때의 김 비린내가 싫다고 했다. 김이라... 그 모든 재료를 감싸고 말아주는 역할을 하는 김을 빼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은 김밥을 먹지 않게 되었던 거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김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따금 배는 고프지 않지만 입이 심심할 때 간식으로 마른 김을 먹기도 하고, 최고의 맥주 안주는 바로 다름 아닌 김이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적당히 짭조름하게 소금이 뿌려져 있고 고소한 참기름(혹은 들기름)이 발라진 조미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맨 김을 좋아한다. 그러니 김이 싫어 김밥을 먹지 않는 그 모습이 참 별나 보일 수밖에. '김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말도 안 돼!'라는 말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몇 번이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이가 말한 김 비린내가 어떤 냄새인지를 알기도 하고, 혹여 모른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별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여러모로 좀 부족했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입맛이 변하곤 한다. 물컹한 식감이 싫었던 버섯도, 밥에 섞여 있으면 마지막 한 알까지 건져내었던 콩도, 특별한 이유 없이 멀리하던 나물도 지금은 너무나 좋아하는 식재료가 되었다. 살면서 달라지는 게 어디 입맛뿐일까. 누구를 만나고 어떤 책을 읽고 또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게 되는데 하물며 입맛쯤이야. 그러니 그때 그이는 어쩌면 지금은 '그땐 그랬지' 하며 누구보다 김밥을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전히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도 나는 김밥을 만다. 김밥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으려나. 밥을 먹을 때마다 거의 매번 새 밥을 지어먹다 보니 찬밥이 없는 날이 많다. 냉동해 둔 밥이 없고, 즉석밥 또한 없다. 그렇다고 혼자 밥을 먹을 때 새 밥을 지을 정성도 부족한데 그 와중에 김밥은 먹고 싶다. 그렇다면 고민할 것 없이 밥은 빼고 말면 되는 거지. 김밥이지만 밥은 없는 김밥. 대신 냉장고를 털어 다른 재료에 충실하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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