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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pr 05. 2023

L 언니와 조 선생님

달래 무침

비닐봉지를 열자 기분 좋은 달래 향이 코끝을 톡 치고 이내 흐응 코웃음이 나고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녁 메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 가벼운 고민이 있었는데, 그 고민이 무색하게 자연스레 달래 무침으로 정해진 상태였다. 새어 나온 코웃음은 고민이 해결되어 마음이 가벼워져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진한 달래 향이 좋았던 순간을 싣고 와서가 컸을 거다.


언제 봐도 도저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맑은 미소의 소유자인, 과거 나의 직장 동료였던 L 언니를 만나고 왔다. 이제는 비록 얼굴에 기미와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늘었어도 꽃무늬 플레어스커트와 맞춤처럼 몸에 딱 맞는 블루톤의 블라우스를 입고 해사하게 웃던 십수 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언니가 나보다 먼저 퇴사를 했고 이후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도 아직까지 꾸준히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둘 다 무자녀 부부이고 두 마리의 반려견을 돌본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이기도 할 테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서로의 오차범위를 넘어서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


문화 센터에서 강의를 하는 뜨개 선생님이었고, 내로라하는 고객센터의 민원 담당자였다. 지금은 방송통신대학교의 학생이며 반려견 행동 지도사 자격을 취득해 반려견 놀이터의 관리 직원이기도 하다. 매일 새벽 요가로 수련을 하며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는 일에도 게으름이 없다.


나이가 들면 삶이 지루해진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사람. 물론, 일상의 다이나믹함은 줄어들지라도 결국 살아가며 느끼는 재미는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L언니를 보면서 배운다. 더불어 5년 후에 내가 지금과는 또 다른, 어쩌면 더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언니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조금씩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인데 오늘은 이렇게 나를 웃게 만든 달래까지 받아 오게 된 거다.


언니를 만나러 간 백미리에서 언니의 직장 동료인 조 선생님을 만났다. 45년생이신 조 선생님은 무릎이 조금 불편하실 뿐 눈도 귀도 밝은 분으로 겉으로 보기엔 열 살은 더 젊어 보이셨다. 동료의 친구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집에서 달콤한 과일까지 간식으로 준비해다 주시는 다정한 분이셨다. 처음 연세를 알고는 동갑이지만 오히려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는데, 마주 앉아 말씀을 나누다 보니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도 못지않게 다정하셨던 시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인지 처음 뵙는 어르신인데도 함께 나누는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조 선생님은 지천에 달래가 깔렸으니 캐 가라며 집에서 손수 괭이를 가져다주셨다. 그 덕에 L 언니는 난생처음 계획에 없던 달래를 캤지. 처음에는 괭이질이 서툴러 달래 머리를 다 떼어먹어 지켜보던 조 선생님과 나를 웃게 만들더니 어느샌가 능숙하게 캔다. 아 참, 언니는 이렇게 손끝이 야무지고 일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지.


L 언니가 달래를 캐고 흙을 털어내는 사이 조 선생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펼쳐 놓으셨다. 10년 전 어촌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놀면서 쉬면서 지낸다고 하셨지만, 알고 보니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에 450평이 넘는 밭도 갖고 계신 분이셨지. 어촌에 살지만 어업을 하지 않으시는 분과 어촌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용히 지갑 속에서 당신의 건물주 명함을 건네주시던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감자 캘 때 불러달라는 말에 사람 좋게 웃어 보이시던 조 선생님의 모습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았다.


과거의 직장 동료와 그녀의 현재 직장 동료라. 게다가 아버지벌의 연세라니. 뭔가 어색한데 재미있고 낯설지만 흥미롭다. 어색하고 낯설어도 충분히 좋은 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는 법이지. 어쩐지 나도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괭이를 챙겨다 주신 조 선생님과 손수 달래를 캐고 손질까지 해서 싸준 언니 덕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마트에서 파는 달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이 끝내주게 진한 노지 달래를 얻었다. 오늘의 달래는 L 언니이며, 조 선생님이며, 정겨웠던 시간이다. 이러니 코웃음이 나올 수밖에.


최소한의 양념만으로 무쳐내 갓 지은 따끈한 밥과 함께 저녁상에 올린다.


"오늘따라 달래가 유난히 좋네. 어디서 샀어?"


달래 무침을 먹던 남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오늘 이 달래는 그냥 달래가 아니야. 이 달래로 말할 것 같으면..."


마른 김을 한 장 손에 올리고 언니의 이야기를 한 번, 달래 무침을 올리고는 조 선생님의 이야기를 또 한 번. 그렇게 빠짐없이 더 해 야무지게 싸서 입에 넣는다. 흐응 코웃음이 다시 또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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