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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y 04. 2023

Vacation Fund

대리 부르신 분?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리시기 전에 대리비를 지불하시죠. 그전엔 내릴 수 없습니다. 혹여라도 '에라 모르겠다'하고 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손모가지.. 아니, 저녁밥은 구경도 못하실 수 있습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아침의 나는 수많은 부캐 중 하나인 대리기사를 꺼냈다. 그렇게 영등포 거리를 달리는 이대리가 되어 지난밤 술자리로 인해 아침이 힘든 남편을 회사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고 대리비를 받았다. 대리기사는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소환되는 나의 부캐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새신랑 남편은 나 없이 친정 오빠와 사촌 오빠를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쓸데없지만 알 것 같은 긴장 속에 혼자 취하고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우여곡절 끝에 택시를 타고 집에 왔지만 지갑은 분실되었고, 어디에서 넘어졌는지 입고 있던 청바지는 무릎이 찢어져 있었으며, 안타깝게도 그 모든 상황은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였을까.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집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결혼 14년 차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누군가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잠만 잘 잔다고도 하던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도무지 난 그게 잘 안된다.


한 번은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택시 기사님과 택시비로 다툼이 생긴 적이 있었다. 야간 할증에 지역 간 이동으로 추가 할증까지 붙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때가 막 야간 할증요즘이 인상된 직후라 출동한 지구대 순경도 택시비를 듣고는 이상하게 너무 많이 나오기는 했다고 놀랄 정도였으니. 택시비 다툼이 있은 후 남편의 술 약속이 있는 날엔 나의 불안은 더 심해졌고, 결국 대중교통이 끊기는 시간이 넘어가게 되면 매번은 아니어도 거기가 어디든 가급적 데리러 간다. 그렇게 때로는 택시기사로, 때로는 대리기사로 변신을 하게 되는 거다.


순전히 내 맘이 편하자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실 굉장히 피곤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안의 기사가 소환되는 시간이라는 건 대부분 평소 활동하는 시간에 비해 늦거나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손사래 치던 남편도 어느샌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입으로 '미안해' 혹은 '고마워'라고 말은 하지만 어쩐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분명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화딱지가 나는 날들이 늘어나던 어느 날, '이대리 잘 부탁해요' 하며 대리비를 주는 게 아닌가. 그래 이거다!


실제로 대리기사님들께 지불하는 대리비에 비한다면 말도 못 하게 적은 금액이지만, 그저 말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남편의 주머니에서 뭐라도 나오는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그런 식의 운전을 하게 되는 날엔 남편에게 대리비를 받게 되었고 마치 어릴 적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넣듯 투명한 통을 마련해 대리비를 넣게 되었다.


대리비 저금통을 눈에 띄는 곳에 둔 덕인지 명목은 대리비였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며 가며 어느 날은 천 원짜리, 또 어느 날은 오만 원짜리를 채워 넣기도 했다. 언젠가 집에 오셨던 친정엄마는 투명한 저금통의 정체에 대해 들으시고는 재미있다며 지갑 속 지폐를 꺼내 통에 넣으신 적도 있다. 땡큐 김여사!


그렇게 모인 돈은 생활비로는 당연히 쓰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 개인 용돈으로도 딱히 손이 가지 않았다. 단순하고 재미없는 대리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노동과 남편의 지불에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찾은 것이 바로 vacation fund!


일단 여행이라면 아무래도 평소보다 큰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야금야금 모은 돈으로 전액을 다 충당하기는 어렵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어느덧 1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당장에 쓸 돈도 아니고 조금이나마 이자를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저금통에서 꺼내 은행 계좌에 넣어 두었다. 아쉽게도 오며 가며 저금통에 돈을 넣는 일은 사라져 증액 속도는 현저히 더뎌졌지만, 덕분에 남편은 지갑에 현금이 없다며 은근슬쩍 넘어가던 일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한참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엔 코로나만 끝나면 어디든 가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스크도 벗고 여행도 자유로워진지 한참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의 펀드는 만기가 계속 연장되는지 깰 생각을 못하고 있다. 마음은 이미 방콕 거리를 누비고 있고, 제주 해안을 산책하고 있으며, 강릉의 일출을 보고 있는데 말이지.


누군가는 오늘 나트랑으로 떠난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미 여름휴가 계획을 끝냈다고 하던데. 어떻게, 올해는 시원하게 펀드 한 번 깨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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