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말하고 싶다
25층 꼬마 이웃 준이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겨우 뗐을 때부터 길에서 루피와 보아를 만나면 멀리서부터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해주던 아이였다. 엄마 손을 잡고 어린이집을 가던 길에서도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보아와 한참을 인사하고, 어느 날은 바스락 인형을 준비해 보아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보아의 지나친 애정공세에 가끔 당황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기꺼이 그 애정을 받아주었고, 만나지 못한 날이 이어지면 엄마에게 '보아 본 지 오래되어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는 다정한 아이였다(대부분의 아이들의 겁이 많고 데면데면한 루피보다는 아무래도 애교 많은 보아를 더 좋아한다). 그러던 꼬꼬마 준이는 올해 초등학생 꼬마가 되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보아를 발견하면 '보아다!' 하며 반기던 꼬마 준이는 얼마 전부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문이 열리고 보아가(그리고 루피가) 보이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친다. 혹여 아이가 놀란 건가 싶어 '어머, 미안해'가 나의 인사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아이고, 아니에요'가 아이 엄마의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자연스럽지만 불편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이는 줄행랑을 쳐버려 정작 귀여운 꼬마 준이와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던 길에 아이의 엄마를 마주쳤다. 꼬마 준이는 등교 후라 자리에 없어 예전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보아는 몸을 밀착시키며 애정을 표현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학교에서 안전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 개물림 사고와 관련된 교육이 있었는가 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영상을 보여주었고, 그 이후 아이가 강아지를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거다. 해서, 보아를 만나게 되면 놀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막상 마주치면 몸이 먼저 반응하고 돌아선 뒤에는 언제 놀랐냐는 듯 엄마에게 '근데, 엄마. 보아는 정말 귀여워'라는 닿지도 않을 말을 한다고.
성인인 나도,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나도 이따금 개물림 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고 장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다. 바로 보지 못한 영상마저도 며칠 동안 잔상이 남을 정도인데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어린아이의 머릿속엔 얼마나 크게 각인이 되어있을까.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로 진행되는 교육이라는 것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꼭 그렇게까지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영상을 직접 보여줘야만 속이 후련했냐?!'라고 목놓아 소리쳐 묻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고 말하며 목줄을 풀고 산책하는 보호자들을 종종 본다. 그렇게 물지 않을 거라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뒤꿈치를 물려고 했던 적도 있었고, 루피와 보아에게 달려든 적도 있었다. 안 무는 개가 어디 있나. 그저 아직 물지 않았을 뿐인 거지. 사고는 원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니 조심해서 해가 될 건 없겠지만, 아이와의 반가운 인사 시간이 사라져 버린 아쉬움은 감출 수가 없구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비단 꼬마 준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은 이사를 가고 없지만 위층에 살던 채윤이도 그렇고, 13층의 하랑이도 그렇다.
아이들과 나누는 인사는 늘 내게는 눈부신 햇살과도 같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나,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날에도 아이들의 웃음은 언제나 효과가 끝내주는 영양제 같았다. 그러니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꼬마 준이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작고 사랑스러운 우주이자 나의 웃음 버튼 하나를 잃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와의 짧은 인사가 내게는 그토록 작지만 큰 행복이었으니. 루피와 보아. 나의 원피스 남매와 함께 하는 산책의 장점 중 하나가 아이들과의 인사가 수월하다는 거였는데, 이제는 그래서 멀어지고 말았네.
길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다정함을 나누던 시간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될 테고 이렇게 멀어진 거리가 쉽게 회복되기는 아마도 어렵겠지. 꼬마 준이와 보아가(그리고 루피와 나도) 예전처럼 다정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다시 오게 될까. 꼬마가 청소년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면 될까. 아, 그때는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가 기다리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