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가득한 베를린의 응급실

지루할 틈이 없네

by 자유로운 뱁새

나름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자취 5년차, 집안에 이래저래 물건이 많이 쌓였음을 느낀다. 수납장이 생긴다는 것은, 쓰지도 않을 물건을 숨길수 있는 공간이 는다는 것. 자리만 많이 차지하고 잘 쓰지도 않는 큰 멀티프로세스를 드디어 중고거래로 팔려고 결심했다. 설거지는 했지만 그래도 쓰던 물건이니깐 소독을 한번하는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부품들을 청소하다 그만 칼날에 오른쪽 검지가 깊게 베였다. 아니 좋은 일 하려다 피를 보네. 피만 봐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으니. 멍하니 있다 대충 상처를 씻고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약국에서 대충 소독제나 살까 했는데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독일 전국민의 휴가철인 8월, 약국도 마침 휴가로 문을 닫았다. 요리에 쓰는 칼날은 작은 상처라도 병원에서 확인 받는 것이 좋다는 친구 말에 결국 응급실에 가기로 결정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응급실에 간 기억이 없는데, 어쩌다보니 베를린에서만 벌써 2번째 응급실행이다. 그것도 두번다 공교롭게도 손에 난 상처로. 베를린에서 병원을 가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 이벤트다. 첫번째로 응급실에 갈 일이 생겼을 때에는 베를린 외각에서 사고가 나서 앰뷸런스를 불렀는데 한참을 전화도 주고 받고 하더니 도저히 길을 못 찾겠다고, 혹시 통화할 힘이 있다면 조금만 버텨서 버스를 타고 근처 마을 병원으로 찾아가라라는 소리를 들었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아주 다행히도 이번에는 앰뷸런스를 부를 필요가 없는 상처라 제발로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이 열지 않는 주말 낮에 가서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대기실은 한가했다. 인력이 적어서 대기시간이 긴 것은 여전했지만. 친절한 간호사분은 안타깝게도 칼에 베인 상처는 대기시간이 길수도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응급처치를 한 밴드를 풀고 피를 바닥에 뿌리면 우선순위가 높아졌으려나 싶었지만 주말에도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께 괜히 진상이 될 필요는 없으니 얌전히 대기실로 향했다. 지난번 경험을 생각한다면 3-4시간 정도 대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대충 빈 자리에 앉았다. 책이나 볼까 했는데 사람 구경하다 3시간 다갔다. 다친 부위가 같다며 친구가 된 환자들도 보고, 지인이 오자 서러운지 눈물을 흘리는 분도 보고. 하이라이트는 술에 취한건지 약에 취한건지 웃통을 벗고 등장해서 왜 진료 안 봐주냐고 유리문을 차고 두들기던 아저씨...살짝 긴장했었는데 벽에 난폭한 것과는 달리 사람들한테는 해꼬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냥 지금 몸에 화가 많으신갑다, 대기시간내 또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관찰했다. 대기시간 살짝 지루할뻔했는데 역시 베를린, 실망시키지 않는군.


살짝 지쳐갈때즈음 간호사가 진료를 보자며 유리문 너머 진료실로 안내해주었다. 의사가 상처를 보겠다며 붕대를 풀었을때 상처가 생각보다 심해서 결국 꼬매야할까봐 꽤 긴장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할정도로 상처는 깊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걸로 응급실을 왔어야 하나 살짝 머쓱했을 정도. 꼬매도 상관없지만 손가락 끝에 있는 이 정도 상처는 오히려 꼬매는 것이 투머치다라는 말씀에 속으로 안심했다. 테타누스 백신을 맞은 적이 있냐라는 질문에 최근 받았던 기억은 없다라고 하자 잠시 대기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대기실에서도 무한대기를 하더니 여기도 무한대기인가. 그래도 긴장이 풀린 탓에 멍하니 주변 환경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IMG_7153.JPG 분명 손가락만 다쳤는데 온 손을 다친것 같은 과대포장 캐스트


그제서야 느낀 인상은 여유였다. 그러고보니 전에 갔던 응급실도 크게 바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당연히 의사든 간호사든 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어서 한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긴박한 느낌도 없었다. 노인 환자분을 진찰하는 드레드락을 한 의사는 여유있게 할머니와 날씨와 휴가 얘기를 하며 맥박을 재고 있었다. 중간중간 날 담당해주는 의사와도 가끔 농담을 나누고, 심지어 주머니에 있는 가위를 내 담당 의사한테 넘겨주면서 자기 주머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며 나에게 주머니도 보여주었다. 도라에몽인가.


아무튼 직원들은 친절하고 여유롭지만, 절대 필요 이상으로 환자를 케어하는 느낌은 또 아니다. 자신의 일에 바운더리와 우선순위가 있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 느낌. 대기 중에 갑자기 통곡을 하며 지인한테 전화를 하던 환자 한명이 자기는 이렇게 아픈데 아무도 와주지도 않고 봐주지도 않고, 대충 나 이렇게 서럽다라는 말을 엉엉 울며 얘기하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여기는 운다고 먼저 봐주거나 챙겨주지 않는다. 의사 한명이 바쁘게 다니면서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드디어 환자 차례가 되자 와서 진찰하겠다는 소리만 간단하게 한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내 차례는 언제오나 다시 멍하니 기다리고 있으니 아까 웃통 벗은 아저씨가 이번에는 진료실과 대기실을 가로막는 유리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여기는 이벤트가 끊이질 않네. 저분도 그냥 무시하려나 보고 있는데 내 접수를 받아준 유일한 여성 직원분이 문을 열더니 아저씨가 보고 긴말하지 않고 Raus (나가)라고 한마디만 한다. 그 말에 아저씨도 토도 달지않고 건물밖으로 나선다. 이야 멋있는 사람. 그 멋있는 간호사는 내가 있는쪽으로 오더니 너는 왜 안갔냐며 이제 집에가도 된다고 나도 보낸다. 그렇지만 기다리라고 했는데요, 라고 말할 기운도 의지도 없었다. 그 길로 나도 얌전히 집으로 향했다.


아무튼 응급실도 이미 한번 경험해봤다고 이번에는 순탄하게 잘 다녀왔다. 하필 오른쪽 손가락이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운동은 커녕 집안일도 제대로 못할것 같지만 그래도 큰 탈이 안 났다는 것에 감사하며. 베를린에서 나날이 강해지는 느낌이다.

IMG_7165.HEIC 누가 손가락 붕대를 이렇게 감냐며 투덜투덜 과대포장 캐스트를 풀아준 우리 귀여운 Hausarzt가 붙여준 작고 소중한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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