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없이 여행한 6개월, 무엇이 변했을까?
집으로 가는 길
_ 이 비행기 한국으로 가는 거 맞지? 영 실감이 안 나네. 그냥 또 다른 곳으로 여행 가는 것 같아.
_ 난 조금 두려운 느낌도 들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걸까 봐.
6개월 내내 입어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바쁜 숨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언제나 그리웠던 집이지만 막상 돌아가려니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바짝 긴장이 되었다. 지루한 비행시간 내내 잠이 오지 않았고 가끔은 기이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고 손에 땀이 나도록 긴장도 되었다. 빗지 않은 머리와 늘 같은 차림새, 짙어진 주근깨가 다시 신경 쓰였다. 여행하며 마음에 들던 내 모습이 규격화된 인형으로 되돌아갈까 두려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출발하기 전에는 어서 집에 가고만 싶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곳에서의 평범한 일상들이 궁금했다. 매일 점심메뉴를 정하느라 애를 먹고, 주말엔 친구 신혼집에 집들이를 가고, 회사에서 생긴 억울한 일을 토로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랑싸움과 혹독한 이별로 우울하기도 한. 그런 사소하고 익숙한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어 집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1년에 몇 번쯤은 지독하게 그립기도 하고 그중 몇 번 참을만하기도 했다. 머물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돌아오고 싶은, 그런 시소 같은 마음에 균형을 잡고 사는 일이 지금 내 삶인 것 같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떠올려 본다. 가까워오는 익숙한 글자들의 뜨거운 인사와 자주 가던 미술관의 전구 여러 개가 부옇게 떠오른다. 그리고는 초록이 가득한 6월의 남산 아래서 마시는 시원한 녹차와 친구들과 걸어가던 익선동의 언덕배기와 단골집의 달지 않은 당근 케이크와 반가운 사람과의 가벼운 포옹과 투둑 투둑 빗소리가 들리는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소주 한 잔과, 가을에 묻는 나태주 시인의 안부가 떠오른다. 그만큼 그리운 것 같다. 딱 그만큼. 그래. 이 정도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영 나쁘지만은 않겠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이미 변한 것들은 내내 안전할 테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다. 이 여행은 내내 계속될 테니까.
짐 없이 여행한 6개월
2kg 정도의 물건으로 여행하며 생활한 지 6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몇 가지 물건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다. 허리가 자주 아픈 그 애는 마사지를 한다며 테니스공 하나를 얻어 들고 다녔고 동남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선크림과 슬리퍼를 새로 사기도 했다. 처음 여행을 나설 때부터 들고 다니던 다 쓴 다이어리 1권을 여행 중에 버렸고 숙소에 두고 온 휴대폰 충전기 하나가 줄었다. 가끔 불편했지만 주로 평온했던 6개월이었다.
물론 어떤 날은 가방이 작은 게 무척 아쉽기도 했다. 파리의 한 플리마켓에서 오래된 무늬의 찻잔과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 낡은 필름 카메라 한 대를 사고처럼 만났을 때, 로마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콜로세움 기념품을 30분 동안 만지작 거렸을 때처럼 말이다.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면 요 작은 콜로세움 하나쯤은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 그 앞을 한참 서성였다.
가끔 들르는 시장에서 할인 상품과 묶음 제품들을 보며 가슴을 설레 하다 다시 한번 난 아직 멀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산책하듯 가볍게 여행하고픈 이유는 뭘까?
먼저 사소하지만 분명한 증거들이 떠오른다. 악명 높은 유럽 여행의 소매치기로부터 가방을 지켜내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물론 맨 땅에 가방을 내려놓고 사진 찍을 때면 누가 들고 튈까 봐 운동화를 고쳐 신는다) 최대한 침대에서 미적거리다 일어나 1분 안에 짐을 싸고 떠날 수 있고 공항 카운터에서 짐을 부치기 위해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짐을 찾기 위해 꼭 들러야 하는 ‘짐 찾는 곳’을 가뿐히 스킵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매일 짐을 쌌다 풀지 않아도 되고 짐 찾는 곳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사실들이 통쾌했던 것 같다.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를 풀어버린 것처럼, 뜨거운 여름날 살얼음 낀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시원하기만 한. 하지만 여행이 계속될수록 그런 시원함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상의 변화들로 나아갔다.
먼저 짐을 풀고 싸는 시간에 동네를 산책하며 여행의 시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비가 내리면 더 축축해지는 내 안의 정서를 탐구하며 걸었고 눈이 흩날리는 밤이면 쌀쌀한 공기를 내 안에 꾹꾹 눌러 담으며 이 여행의 온도를 측정했다. 일상의 감정들을 그저 소비하지 않는 연습이 되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들은 사지 않고 여행 중 만난 친구들이나 에어비앤비 가족들에게 빌려 사용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더 비싼 물건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고 더 넓은 집이 우리를 더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어떤 물건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때 더 가치가 있었고 무엇이든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무언가를 사야 할 순간이 되면 그게 내게 꼭 필요한지 수십 번 생각했다. 구매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나에게도, 이 세계에도, 이 지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제품을 찾기 위해 꽤 노력했다. (부끄럽게도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 6개월 동안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 조금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게 되었고 내가 가진 물건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느라 소중한 지금을 낭비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고, 미래의 불행 보다 오늘의 여행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가방 하나, 옷 한 벌, 속옷 두 장으로 6개월을 여행하고 나니 무엇이든 일단 저지르고 볼 용기가 생겼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여전히 미궁 속이지만 어떤 생각이든 떠오르는 대로 실천해 볼 수 있는 기운이 생긴 것 같다.
매번 짐을 싸고 푸는 시간, 매일 아침 무얼 입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새로운 일을 도모할 만한 틈이 생겼다. 여행에 보다 집중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엉뚱한 취미를 만들고.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하며, 보다 새로운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배낭 없는 여행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고민해보는 계기이자 내 안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틈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 삶은 어땠을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물건들을 방패 삼아 텅 빈 내면을 채우려 했다. 내리는 비에도, 나리는 눈에도 무감각하게 그저 일회용 우산이나 사면서 멋대로 계절을 흘려보내며 감정을 고갈시켜 버리기도 했다. 배낭 없이 여행하며 우리는 우산을 사는 대신 눈과 눈을 맞추고 비를 천천히 흡수하고 비어있는 일상과 나의 내면을 물건이 아닌 새로운 시도들도 채울 수 있는 시간과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 여행은 흘러가 버린 어떤 날의 나에게 꼭 해주고 싶은 위로이자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시간의 나에게 꼭 전하고 싶은 편지인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한다. 대단하지도 않고 근사하지도 않은 우리의 이야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자기 짐에 대해, 자기 삶에 대해 난처하고 난해하지만 내내 기다려왔던 질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 질문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고민해보는 계기가,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어떻게든 삶을 바꿔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짐이 2kg이라면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짐은 20kg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가방 두 개가 전부인 우리의 여행과 닮은 더 단순하고 가벼운 삶을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이다.
산책하듯 가볍게
아주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갔다. 한 바구니 가득 담긴 깻잎들이 푸른 향기를 풀풀 풍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와 좁은 평상에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아 깻잎 절임을 만든다. 켜켜이 간장 양념을 듬뿍 발라 올 겨우내 먹을 든든한 식량을 만든다. 약간 높은 온도의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느낌이 좋다. 그리웠던 시골의 여름날이다.
엄마는 내가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는지, 왜 이상하게 생긴 가방을 들고 제주도부터 강릉까지 다시 여행을 다녀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가운 포옹과 살가운 안부인사만으로는 딸을 전부 이해할 수 없음을 엄마는 어렴풋이 짐작한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가벼운 가방 하나만 들고 여행을 계속해보기로 했다. 가방이 작고 가벼울수록 여행은 묵직하고 담대해진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가방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법이라 믿으니까. 다시 짐을 싼다. 가방은 여전히 하나, 목적지는 지구 반대편의 조슈아 트리, 떠날 준비는 여전히, 1분.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_ 우린 이제 어떻게 될까? 이 가방을 들고, 이 인생이 어디로 가는 걸까?
_ 글쎄, 모르겠어. 어떻게든, 무엇이든, 되겠지. 안되면 어때? 모르면 어때? 제대로 살지 말자. 멋대로 살아도 괜찮을 거야. 가방 하나로 여행해도 괜찮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