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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Jan 28. 2018

나랑 여행해줘서

너와의 여행, 우리의 동행

방콕의 맥주와 스누피의 명언


방콕 시내는 한참 달아오르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듯 강렬한 태양에 나는 숨이 팍 죽은 시금치처럼 기운이 없었다. 원래는 사원에 가려고 나왔는데 금방 더위에 지쳐버린 나 때문에 우리는 그냥 동네나 어슬렁거리기로 했다. 집 근처의 한 식당에 들어가 생맥주를 주문했다.  


_ 여기, 창 맥주 하나랑 콜라 하나요!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언제나 그 애 앞에 놓이는 맥주와 내 앞에 놓이는 콜라의 위치를 바꾸며 주인아줌마와 살짝 웃었다. 그늘이 진 야외 테이블 아래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니 더위가 조금 물러나는 듯했다. 아까 산 파파야 하나를 입에 넣고 벌컥벌컥 맥주를 비워냈다.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이다. 뜨거운 한낮에, 나무 그늘 아래 축 늘어져선, 차가운 맥주나 벌컥벌컥 마시며 하루를 온통 낭비하는 일. 이십 대의 우리가 이곳에서 보냈던 어느 하루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시 찾은 방콕에서의 하루도 역시 변함이 없다.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사람은 자고로 변해서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유명한 영화 대사도 있건만, 방콕은 이토록 변함이 없다. 오후 4시면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는 여름비, 땀에 흠뻑 젖으며 마시는 이 차가운 맥주 맛, 후덥한 공기를 베개 삼아 졸던 빨간 버스의 좌석. 비를 맞아 더 강렬하게 푸르렀던 여름의 방콕들. 스물둘, 스물다섯, 스물여덟, 서른- 나는 매번 달라지는데 어쩐지 방콕은 끝내 변할 줄 모른다. 그래. 어떤 여름은 영원 속을 지나가니까.* 어떤 여름은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 우리에겐 방콕의 여름이 언제나 변하지 않을 계절로 남아있다.

* 박연준, 여름의 구심력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그건 아마도 우리에게 방콕이란 도시가 여러모로 특별하기 때문일 거다. 우리가 처음 여행을 시작한 도시이자 그 후로 지금까지 함께 여행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싸운 곳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번이 우리의 세 번째 방콕 여행이지만, 변함없는 방콕의 표정이 언제나처럼 반갑고 그 속에 숨겨진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일이 여전히 즐겁다. 그래서 방콕에 올 때면 늘 스누피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에선 말이야. 어디를 가는가 보다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해.' 스누피가 옳다. 여행에서도 어디를 가는가 보다, 무엇을 보는지 보다,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A_ 혹시 치앙마이 가는 버스 기다리세요? 모이라고 한 곳은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야 합니다

B_ (뭐래) 알아요.

A_ (뭐지? 아는데, 왜 안감?) 조금 더 걸어가야 해요. 버스 시간 맞추려면 지금 가야 하는데….

B_ (뭐래!) 네, 안다고요. 더워서 그래요, 더워서.  

A_ (뭐라는 거야? 더운데 방콕 왜 옴?) 아니, 여긴 방콕이니까 당연히 더운 건데….  아니, 그것보다 시간을 지키려면 지금 가야 한다니까요.

B_ (얘 뭐야, 진짜!) 아우, 예, 가요, 갑니다! 그리고 저기요. 더워야 맥주가 맛있잖아요.

A_ 예? 무슨 말씀을….

B_ 그래서 왔다고요, 방콕에, 더운데.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그 애(A)는 나(B)를 정말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정해진 약속 장소로, 정확한 약속 시간에 가는 일이 당연한 건데 저렇게 더워서 늘어져있다니? 게다가 그렇게 더위에 약하면서 대체 왜 방콕 여행을 왜 왔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니, 버스를 놓쳐도 내가 놓치는 거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한다니? 알람시계야? 선생님이야? 그리고 내가 더위에 약해도 이 도시를 여행하는 이유는 다 맥주가 맛있기 때문이라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서로를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 보듯 했던 우리는 그렇게 여러 면에서 달랐다.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는 그 애와 옆구리부터 먹는 나, 육류를 좋아하는 그 애와 채소를 더 좋아하는 나, 셰프를 꿈꾸는 미식가인 그와 먹는 일은 배 채우는 것 말고는 대개 피곤한 나, 술 담배는 입에도 안대는 그 애와 3대에 걸친 애주가 집안의 자식인 나, 구글 일정표 덕후인 그 애와 계획은커녕 달력조차 잘 보지 않는 나, 문학엔 영 관심이 없는 그 애와 시 한 편에 죽고 못 사는 나.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우주의 크기를 계산하는 일만큼이나 복잡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는 방콕 이후로 줄곧 함께 여행해오고 있다. 세상은 온통 이상한 일들 투성이었다.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서른이 되었을 무렵에는 둘다 작정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앞으로의 인생을 고민하겠다며 나란히 사표를 던진 후 1년 간의 긴 여행에 동행했다. 유럽에서 1년을 머물며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여행했다. 베를린에 머물며 각자가 관심 있는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텐트 하나 짊어지고 알프스와 피요르드로 함께 캠핑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각자의 리듬에 맞추며 서로의 템포를 조율하며 따로 또 같이 여행한 것이다. 


24시간 찹쌀떡처럼 붙어 있어야 하는 긴 여행 속에서 우리도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의 연애와 1년의 여행을 넘어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도 우리도 알 수 없는 길을 여전히 함께 걷고 있다. 역시 세상은 이상한 일 투성이다.


두 사람의 여행


우리가 여행을 통해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할 수 없던 이유는 두 사람의 여행이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멋진 장소에서 같이 셀카나 찍으며 낭만적인 고백만 속삭일 법한 둘의 여행은 사실 서로의 민낯을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이며 얼마나 머물 것인지,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 것이며, 저녁은 집에서 어떤 요리를 할 것인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대화하고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B_ 음. 코펜하겐은 꼭 가고 싶은데?

A_ 지금 겨울인 데다, 비행기 값도 비싸고, 겨울 옷도 없는데 엄청 추울걸? 그냥 파리에 조금 더 있는 게 어떨까?

B_ 무슨 소리야. 코펜하겐은 내 평생 제일 가보고 싶은 도시였다고!

A_ 암스테르담도 한 평생 가보고 싶은데 아니었어? (찌릿) 어제 돈 얼마나 썼어? (찌릿2)

B_ 오늘 쓰레기 버리는 건, 당신의 차례일 텐데? (찌릿3)

@Copenhagen, Denmark _weekdaytraveler

매일 여행과 관련된 소소한 문제들로 투닥거려야 하는 건 기본이고 오롯이 둘에게 남겨진 일상의 숙제들을 끈질기게 책임져야 한다. 정해진 예산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빠듯한 장을 봐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당번을 정하고 밀린 빨래를 처리하는 일까지 함께 해야 한다. 그뿐인가?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습관은 물론, 전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치부까지 공유해야만 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입냄새도 잘 참아주어야 하고 하나의 화장실을 이용하며 서로의 장이 건강하도록 매너도 지켜야 주어야 하니까.

@Lisbon, Portugal _weekdaytraveler

처음엔 소꿉놀이처럼 즐겁던 식사 당번도, 시간이 지날수록 귀찮고 지루한 노동에 불과해진다. 망친 음식도, 간이 안된 음식도 참고 먹어야 하며 피곤한 아침에도 누군가는 일어나 밥을 해야 하고 정말 설거지하기 싫은 날도 꾹- 참고 세제를 짜야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규칙을 정하고 다시 수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습관을 묵묵히 견디고 기다려주며 말이다. 일상을 함께 꾸려나가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동행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혼자였으면 조금 더 자유롭고 편안했을지 모르는 여행을 굳이 동행하는 이유는 뭘까? 가끔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무한한 영향을 끼치고 책임감이라는 끔찍한 중력을 견디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걸으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아마 함께 떠나는 여행이 혼자였으면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전혀 새로운 목적지로 우리를 이동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함께 여행하며 배낭을 버리기로 결심한 일처럼 말이다.

@Bangkok, Thailand _weekdaytraveler

B_ 우리 이 많은 걸 다 왜 가져온 거야? 이 스피커, 진짜 왜 가져왔어? 얼마나 크게 음악을 들으려고? 심지어 어떻게 켜는 건지도 까먹었어.

A_ 그래, 여행에 이 많은 게 전부 필요하진 않은데 말이야. 우리, 조금 더 가볍게 여행할 수 없을까?

B_ 오- 이것 좀 봐! 외국에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짐 없는 여행, 미니멀 트래블을 많이 하고 있어. 우리도, 배낭 없이 여행해보면 어떨까?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내다 버리면서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20kg짜리 배낭을 2kg의 가방으로 줄이면서 우리는 조금 더 가벼운 여행, 조금 덜 소유하는 삶, 그래서 보다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혼자였으면 용기 내지 못했을 마음을 서로 부축하며 불필요한 짐들을 하나씩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 지난하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함께, 배낭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서로를 다독이며 걷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던 여행이었다.

@Perth, Australia _weekdaytraveler

생각해보면 오랜 여행 기간 내내 우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사람을 포용하기 위해 언제나 치열하게 대화해왔다. 그리고 과정들이 우리에게 작은 흉터로 그러나 또렷한 좌표로 남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그 좌표가 우리를 새로운 길로 안내하는 표지판이자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소중한 과제라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관계의 시작은 서로의 매력, 관계의 지속은 누군가의 성숙이라고. 달랑 옷 한 벌로 6개월째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는 지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조금 달라졌을까?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여행으로 인해 조금씩 성숙하고 있다고, 서로로 인해 각자의 삶이 더 나은 궤도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이다.

@Bali, Indonesia _weekdaytraveler

몰래 숨겨둔 쪽지엔


가끔 우리는 사랑스러운 커플보다 죽이 잘 맞는 2인조, 3도 화음 잘 쌓는 듀엣, 코드가 맞는 콤비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송송 커플' 보단 '송숙(송은이김숙) 콤비'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그래도 괜찮다. 인생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 여행 중에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저지를 때면 우리가 그런 콤비라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스위스의 아이거산 북벽을 바라보며 매일 캠핑을 하고 아일랜드 딩글의 돌고래를 보기 위해 노숙을 마다치 않고 버스 탈 돈으로 시원한 맥주를 사 마시며 한 시간씩 걷고 급기야 배낭 없이 여행을 하기로 결심하는, 서로 치고받으며 함께 우여곡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상한 2인조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Paris, France _weekdaytraveler

표현에 서툰 2인조는 낭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대신 미안한 일을 자백하거나 몰래 저지른 실수를 고해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와 여행하고 싶다고, 나와 여행해주어서 고맙다고 외투 주머니에 슬쩍 쪽지를 남긴다. 오늘은 여행 중 두 번째 맞는 그 애의 생일을 기념해 나의 고백이자, 자백이자, 고해인 작은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슬쩍 남겼다.


_ 오늘도 제멋대로여서 미안. 구글 캘린더에 흥미가 없어 미안. 손잡지 않고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솔로이스트라 미안. 뭐든 손만 대면 망가뜨리는 파괴자의 운명이라 미안. 그래도 너와 여행하면, 고독한 밤 산책도 아쉽지 않을 거야. 비극을 읽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독방에 갇히거나, 영원한 모험을 떠나야 한대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내가 후질 때 후지다고 말해줘서, 내가 최악일 때 정신 차리라고 화내 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랑 여행해줘서. 가자, 맥주나 마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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