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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오일여행자 Jan 21. 2018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여행하기 위해

‘대만'이라는 시장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시장부터 찾았다. 들뜬 마음으로 찾아간 대만의 야시장은 명성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몸 돌린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찬 길을 휩쓸리듯 걷다 보면 작은 노점상들이 물결처럼 흘러만 간다. 들판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처럼 빼곡한 사람들 틈에서 몰래 꼬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주룩- 빠져나오는 구수한 육즙이 바쁜 마음에 조금 안심을 주었다.

@Kaohsiung, Taiwan _weekdaytraveler

야시장을 거닐다 우연히 들어간 국숫집에서 우리는 '미엔?'이라고 어설픈 중국어를 뱉었다. 할머니는 메뉴판 앞으로 우리를 끌고 가선 면 요리로 추정되는 4개의 요리를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당연히 중국어로. 무슨 뜻인지 모를 설명을 한참 듣고 나서 우리는 가운데 적힌 국수 하나를 (그러니까 아무거나 골라서) 주문했다. 무슨 음식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젓가락을 들고 있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셰프의 추천음식을 기다리는 기분이랄까? 그보다 더 괜찮은 것만 같았다. 아마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던 할머니 덕분이 아니었을까?

@Kaohsiung, Taiwan _weekdaytraveler

생각해보면 시장의 할머니도, 거리의 젊은이도, 대만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처럼 친절했다. 모두 한 얼굴로 정겨웠고 한 마음으로 따뜻했다. 길을 잃은 영혼을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DNA가 내재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버스 안에서 ‘이 정류장이 맞나? 지금 내려야 하나?’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으면 선뜻 다가와 다음 정류장에 내리라고 말해준다. 멋모르고 택시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손을 잡고 가 버스 정류장에 세워주고 마트에서 무슨 맛인지 모르는 음료수를 집어 들면 그건 맛이 없다며 다른 걸 골라준다. 누구든 여행에 서툰 사람도, 누구든 여행이 질려버린 사람도 다시 여행을 사랑하도록 격려를 주는 곳이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푸근한 어느 시장처럼.

@Jiufen, Taiwan _weekdaytraveler

시장 한복판에 있는 집


그 자체로 거대한 시장 같은 나라가 대만이라지만, 정말 시장 한가운데에서 며칠 밤을 보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장 한복판의 집을 발견하게 된 건 그다음 날이었다. 늦은 밤에 도착하여 야시장을 둘러보고 우리는 근처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한자로 적힌 주소를 들고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 나선 것이다.

@Taipei, Taiwan _weekdaytraveler

한자로 적힌 집주소를 들고 우리는 이곳저곳을 한참 헤매고 다녔다. 마침내 도착한 7번지 집 앞에서 여러 번 벨을 누르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나오셔서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손에 들고 있는 주소를 보여드리고 숙박이 예약된 에어비앤비 앱을 보여드리니,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우리에게 한참 무언가를 설명을 하신다.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찾아온 모양이다. 어르신은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인 두 명의 손을 잡아끌고 건너편 시장으로 걸어가셨다.


_ 이 시장엔 왜 가시는 거지? 우리 배고파 보이나?

_ 아무래도 우리를 데려다주시려는 것 같아. 이 시장이 지름길인가 봐.

@Taipei, Taiwan _weekdaytraveler

북적거리는 시장 골목에는 각종 야채 가게와 30위안짜리 국숫집이 즐비했다. 수십 년째 같은 표정이었을 법한 시장 안은 매일 같이 장을 보러 나오는 동네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래된 잡화점에서 검은색 시장 봉지가 인파에 가볍게 휘날렸다. 한참 시장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앞장서서 걷던 어르신이 멈춰 서신다. 을씨년스러운 정육점 앞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 도마,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뭉텅이로 걸린 쇠고리 그리고 그 주변에 들끓는 엄청난 파리떼. 그 흉흉한 정육점 바로 앞집이, 우리가 머물게 될 7번지였던 것이다. 대만에서의 우리 집은 그렇게 축축한 도마 위, 오래된 시장 골목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 집을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Taipei, Taiwan _weekdaytraveler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루이스였다. 짧은 머리의 다부진 체격, 호쾌한 웃음소리가 매력적인 루이스는 내 손을 잡으며 짐이 이렇게 적은 여행자는 너희들이 처음이라며 크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 덕분에 두렵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을씨년스럽던 정육점이 푸근해 보였고 낡은 시장 건물이라 여기저기 녹이 난 계단도 다 정겹게 느껴졌다. 대만에 왔으면 시장에서 먹고 자야지, 암암-


타이베이-크루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 보니 루이스와 함께 마라톤을 뛰는 크루들이 모임 중이었다. 간단한 다과상을 앞에 두고 우리는 대학 동아리에 처음 가입하는 신입생이 된 기분으로 그들 앞에 섰다. 왠지 이 멋진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루이스가 우리를 소개하며 우리의 작은 가방을 가리켰다. 가벼운 우리의 짐에 대해 이야기한 모양이다. 친구들은 루이스가 소개를 끝내자마자, 집 안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Jiufen, Taiwan _weekdaytraveler

우리는 어느새 마라톤 동아리, 타이베이-크루의 구성원이 된 마음으로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특히 오랜 기간에 걸쳐 대만 섬 전체를 달리기로 완주한 선배의 이야기는 우리 몸과 마음을 오징어처럼 완전히 녹여버렸다. '이 선배, 닮고 싶다!' 생각하는 찰나 친구들은 오히려 '너희들 참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우리의 여행에 대해 물었다. 적은 짐으로 얼마나 여행했는지, 짐이 적어 불편하진 않는지, 왜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엄청난 질문을 했다.

@Taipei, Taiwan _weekdaytraveler

사실 우리가 유럽 대륙에서 아시아 대륙까지 9개 나라를, 5개월 간 이 가방만 달랑 들고 여행할 수 있었던 건 루이스와 같은 에어비앤비 친구들 덕분이다.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동안 낯선 사람들과 한 집을 꾸리며 여행해왔다. 그들은 짐이 없는 우리를 위해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기꺼이 공유해주었다. 포근하게 잘 마른 이불과 수건, 따뜻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간단한 조리 도구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찬바람 부는 밤에는 두툼한 코트를 빌려주며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자신의 물건을 선뜻 내어주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랜 기간 짐 없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모양의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오늘 이 마라톤 크루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멋진 마라톤 선배들과 우리는 서로의 여행사를 나누느라 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Taichung, Taiwan _weekdaytraveler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타이베이-크루가 추천해 준 여행지는 대만 섬 중앙에 위치한 아리산이었다. 그곳에 가면 신처럼 산을 지키는 나무를 만날 수 있다며 꼭 가보라고 추천해준 곳이었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짧은 기간 동안 빠듯하게 준비를 했는데 떠나기 며칠 전 카메라가 고장나버렸다. 대만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메라 고장이라니! 야시장에서 사진을 얼마나 찍었더라, 앞으로 일정이 얼마나 남았더라, 카메라는 어떻게 고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집을 나서던 루이스를 만났다.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_ 루이스! 우리 카메라가 고장 났어. 어쩌지? 대만을 여행하는 동안 사진이 얼마 없을 것 같아. 아 정말, 우울해.

_ 마라톤을 하다 보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나. 걸어야만 볼 수 있는 작은 풀꽃, 멋진 교외의 건물들, 다 사진으로 오래오래 남기고 싶지만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달릴 순 없잖아. 그래서 우린 그걸 마음에 담아. 가끔은 그렇게 마음에 담은 풍경들이 더 생생한 것 같아. 너희들은 짐 없이 5개월을 여행 중이잖아. 이번 대만 여행은 카메라 없이 해봐.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생각해보니 루이스 말이 맞았다. 속옷 두 장, 양말 두 켤레로 5개월째 여행 중인데 카메라 하나 없는 게 뭐가 그리 큰 대수일까 싶었다. 간직하고 싶은 풍경은 핸드폰으로 보관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그 애는 동네 사진관을 돌아다니며 작은 일회용 카메라를 하나 구했다. 장난감처럼 생긴 작은 일회용 카메라를 가방에 넣으며 더 좋은 카메라로, 더 아름답게 꾸며 담지 않아도 우리 마음에 남은 풍경이 언제나 더 선명할 거란 믿음이 생겼다. 그건 아마 루이스의 조언 덕분일 거다.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아리산으로 향하는 산림 열차는 느리지만 천천히 움직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산을 빙글빙글 감고 돌며 숱한 나무와 짙은 식물들을 스쳐갔다. 빈틈없이 우거진 천년 고목들 사이로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이 고혹적인 숲,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신의 나무들이 살고 있다는 숲, 자신의 미래를 묻고 비린 과거는 묻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런 신비한 숲이었다.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그중 한 나무를 만났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대담한 가지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대지를 두드리는 거대한 뿌리는 보이지 않은 세계로 조용히 길을 내고 있었다. 습기를 한가득 머금은 나무들이 누군가 뱉어 놓은 입김처럼, 묵직한 벨벳 커튼처럼, 우리의 몸을 휘감았다. 왜 친구들이 이곳에 신이라 불리는 나무가 모였다고 했는지 불현듯 이해가 되었다. 누구도 그 나무를 신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엔.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스무 장 무렵 되었던 일회용 카메라를 다 써버리고서 핸드폰으로 몇 장 더 사진을 찍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말없이 나무들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지금 이 순간의 풍경에 집중하며 루이스의 말처럼 이 감정을 화면 대신 마음에 담으려 애썼다. 그러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에게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고 지금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가 언젠가 파리에서, 어떤 연인의 뒷모습을 찍어 전달해 준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흔쾌히 우리의 부탁에 응해주었다. 보기 좋게 담긴 프레임 속의 풍경을 기꺼이 우리에게 보내주리라 약속해주었다.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오랜만에 열어본 메일함에 낯선 이름으로 편지가 한 통이 와 있었다. 아리산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행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만 사진 몇 장을 첨부해 보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은 아리산의 멋진 풍경을 늦었지만 잘 감상하길 바란다는 글과 함께, 카메라는 잘 고쳤는지 물었다. 대만 여행을 마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이따금씩 아리산 중턱에서 만난 여행자들의 사진이 도착한다. 그들이 보내주는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이 퍼즐처럼 우리의 대만 여행을 완성해가고 있다. 

@Fen Chi Hu, Taiwan _weekdaytraveler

어쩌면 우리의 대만 여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한 장의 사진처럼,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늘 부족한 우리의 여행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채워져 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여행자가 보내준 사진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물건이 없으면 없는 대로, 무언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순간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여행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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