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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정훈 Oct 22. 2022

8월 24일 수요일 : 회식 날

  매주 화요일이나 수요일에는 연구소에서 회의가 있다. 연구원들이 개발한 시료를 시음하고 의견을 나눈다. 마케팅팀은 담당 브랜드와 관련된 안건이 있을 때만 참여한다. 리뉴얼로 제품의 레시피를 바꾸거나 확장 제품의 맛을 검토하는 날처럼. 

  그날은 4분기에 출시할 한정 제품의 레시피를 확정 짓는 날이었다. 그간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스무 가지 넘는 시료를 시음했고 좁히고 좁혀져서 최종 두 가지 시료가 남았다. 오늘은 두 가지를 시음하면서 한정 제품을 어떻게 빚고 어떤 관능적 특징을 가진 제품으로 만들지 정하는 날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마케팅 담당자로서 제품의 출고 가격을 확정 짓는 일도 진행해야 했다. 나는 연구소 주류 개발팀장에게 시음을 마친 다음 이어서 가격 안 보고를 하겠다고 언질을 줬다. 

  부족한 수면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로 치부했던 몸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보통 책을 읽거나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가는데, 그날따라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얼른 일어나 줬으면 좋겠단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고민스러웠다. 혹시 내가 코로나면 어쩌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시음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내리는 순간이 있을 텐데... 그렇지만 중요한 회의인 만큼 참여는 꼭 해야 할 것 같고... 아직 문을 연 병원은 없어서 회의 전에 항원검사를 받기도 어려운데... 위험한 결정일 수도 있지만 회의에는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자는 마음도 먹고.       


  연구소 회의는 연구소장이 오늘 회의 안건을 언급하고 담당자가 준비한 자료를 발표한 다음 시음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담당자인 주류 개발팀장은 오늘 시음할 두 가지 시료가 제법, 재료 측면에서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고 연구소에서 분석했을 때 산미, 감미의 정도는 어떤지, 발효 패턴은 어떤지, 관능적 특징은 어떠했는지 발표했다. 이어서 술이 담긴 두 개의 와인 잔을 받았다. 와인 잔 바닥 부분에는 각각 A, B라고 쓰인 라벨링 스티커가 붙어 있다. 먼저 향을 맡아 두 시료의 차이를 비교해본다. 큰 차이는 없다. 나는 미각과 후각의 예민함이 평균 이하이기 때문에 미세한 차이를 잘 감별하지 못한다. 시음을 해보니 마찬가지로 두 시료 간의 차이가 크지 않다. 두 번째 시료에서 산미가 약간 더 튄다는 느낌을 받지만 솔직히 대동소이하다고 느낌이다. 

  나의 미각이 좋지 않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에 연구소 회의에서 내 의견을 좀처럼 묻진 않는다. 평소처럼 침묵하는 사이 레시피는 A로 결정됐다. 어떤 시료로 결정되어도 맛이 좋다고 느끼던 터였기에 결정에 불만은 없었다. 이제 가격만 결정하면 된다.  

  가격을 정할 때는 원가, 다른 제품의 가격 등을 고려해서 안을 만든다. 나는 상시 운영하는 제품의 원가와 출고 가격, 채널별 판매 가격을 왼쪽에, 한정 제품의 원가와 출고 가격, 채널별 예상 판매 가격을 오른쪽에 정리한 자료를 띄웠다. 한정 제품이고 패키지에 공을 많이 쏟았기 때문에 원가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선물 같은 제품이길 바랐기 때문에 낮은 출고가를 제안했다. 한정 제품이라는 미명 하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는 제품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고 그런 경험을 한 소비자들도 결국은 좋지 않은 인상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대표님은 의도는 알겠지만 그래도 가격이 조금 더 높아야 한다고 피드백을 줬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다시 정리해서 최종 보고를 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안건이 나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조금이지만 술을 마신 탓인지 몸에 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중요한 보고를 마쳐서 그런지 아니면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살짝 눈을 붙였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이기도 했고 잠깐이라도 자두지 않으면 오후 컨디션이 엉망일 것만 같았다. 


  20~30분 남짓 졸고 났더니 몸에 더 열감이 느껴졌다. 느낌이 싸한 것이 코로나 같았다. 회의실에서 조심하긴 했지만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이 맞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파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석한 걸 후회했다. 어서 신속 항원검사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회식까지 갔다가 더 큰 불상사를 만들면 곤란하다. 연구소 근처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가 음성이긴 한데, 지금 체온이 39.4도로 무척 높은 편입니다. 음성이 나왔다가 양성이 나오는 경우도 많으니까 PCR 검사도 받아보는 거 어때요?”

  의사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몇 달 전 아내가 코로나에 걸릴 때에도 음성이 두 번 정도 나왔다가 양성이 떴기 때문에 나도 비슷한 양상을 겪을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PCR 검사를 받고 나서 대표님께 연락을 했다.

  “대표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신속 항원검사를 받았는데 음성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몸살기가 있고 체온도 높은 편이라서 PCR 검사까지 받게 됐고요. 죄송하지만 오늘 회식은 미루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알겠어요. 회식 날짜 다음에 다시 잡아봅시다.”

  팀원들에게도 단톡방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팀원 한 명에게는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으니 노트북을 1층 안내 데스크에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퇴근길에 죽을 사 왔다. 나는 낙지 김치죽, 해물짬뽕죽처럼 매콤한 죽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혹시 모르니 순한 음식을 먹으라며 전복죽을 사 왔다. 입맛이 없었다. 한 술 두 술 떴지만 억지로 쑤셔 넣는 쪽이었다. 몇 술 뜨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처방받은 해열제 챙겨 먹었다. 그러자 솔솔 졸음이 밀려왔다. 감기 기운이 있으면 늘 일찍 잠에 들었다. 푹 자고 나면 대체로 컨디션을 회복했다. 이번에도 그러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솔로>만큼은 빠지지 않고 본방 사수를 해왔지만, 이 날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돌싱 특집이 오늘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출연했을지 궁금했지만 몸 상태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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