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현 Jul 27. 2021

자신의 키워드를 발견하고 가꾸기

[인터뷰] 사적인 관심 1. 마케팅 매니저 룰

일 하면서 만난 5~6년 차 중간 리더를 떠올리면 여성이 꽤 많았다. 팀장, 시니어 등 다양한 타이틀로 표현되던 여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실무에서 10년 차 여성 리더를 만나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마케팅 툴을 만드는 스티비 팀에 마케팅 매니저가 왔다. 게다가 10년 차 마케터. 마치 희귀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나는 룰님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지현: 룰님, 인터뷰에 앞서 자기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룰: 주로 제가 인터뷰어인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인터뷰를 당하게(?) 되니 신기하네요. 매일 사무실에서 뵙는 지현님과 하게 되니 더 기대되고요. 간단히 제 소개를 하면 저는 스티비 마케팅 매니저 이루리이고, 10년 차 직장인이에요. 입사한 지는 이제 1년이 되어가고 있고요. 스티비 팀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메일, 뉴스레터를 보내고 받는 경험이 모두 즐거워질 수 있을지를 마케팅 적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할까 말까 할 때 하면서 이거 저거 다양하게 시도해보며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시도. 룰님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다. 옆에서 지켜보면 룰님은 부지런하게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바쁘게 지내는데 그 바쁨이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귀엽다고 할 수 있다. 귀여운데 바쁘고, 늘 활력이 넘치는 사람. 그런 룰님에게도 힘든 일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지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시간이 빠르네요. 스티비 팀에 합류하고 나서는 어떤 프로젝트가 가장 어려웠나요?


룰: 마케팅 업무를 프로젝트로 딱 구분하기 어렵지만, 굳이 나눈다면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와 ‘크리에이터 트랙’,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둘 중에서는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가 어려웠는데..., 어려웠다는 표현보다는 ‘힘들었다’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리겠네요.


지현: 어렵다와 힘들었다가 비슷한 데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네요. 어떤 부분이 힘들었나요?


룰: 입사하고 거의 바로 맡은 일인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많았거든요. 마감일도 여러 번 바뀌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뀌기도 했고요. 팀에서는 오랫동안 해왔던 프로젝트지만, 저는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였잖아요. 하지만 저는 또 경력직으로 이직한 사람이니까 프로젝트에 대한 히스토리나 정보를 어디까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이런 건 내가 결정해도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10년 차니까 ‘알아서’ 잘하고 싶었는데, 종종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면 무력감을 많이 느꼈어요. 입사 전부터 좋아하던 프로젝트라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더해져서 여러모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서 어떤 점을 배웠나요?


룰: 덕분에 생각하게 된 주제이기도 한데요, 일에 대한 온도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사람마다 일에 대한 ‘책임감’, 일을 대하는 ‘에너지 레벨’이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건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한동안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나의 일상까지 괴롭히는 게 힘들었는데요, 어느 순간 조금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외부 변수’가 나 개인의 행복이나 에너지를 해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어요.


지현: 일이 나 개인의 행복을 해치지 않도록. (끄덕끄덕)


룰: 네.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 게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얻은 거라고 생각해요. 또 나는 ‘팀’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에 ‘회사’에 들어왔다고 더 확신하게 되기도 했어요. 누군가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래요. 이 프로젝트를 나는 ‘팀’의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이 나만큼 몰입하기를 바라고 그게 아니면 아쉬워한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에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팀'으로 ‘즐겁게’, ‘소진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현: 일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일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많이 언급한 점이 인상적이네요. 룰님이 같이 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요.


룰: 같이 산을 올라갈 때, 누군가는 건강을 목적으로 누군가는 함께 하는 사람이 즐거워서, 누군가는 산을 정복하고 싶어서 올라가잖아요. 서로 목적은 다를 수 있어도 ‘정상까지’라는 목표와 ‘오른다'는 방향으로 함께 하려고 모이는 게 팀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처음 정했던 목표와 방향을 잊을 수 있으니 이를 계속 공유해야죠. 자칫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에만 집중하다가 팀이 산에 오르지 못하면 안 되니까요.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도 일하는 목적, 동기는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약속한 날까지,’ ‘완성한다’를 지킬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던 것 같았어요.


지현: 왜 그랬을까요?


룰: 프로젝트에서 제 역할을 잘 모르고 시작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 저는 이 프로젝트를 돕는 입장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제가 이끄는 입장이었거든요. 나중에 깨닫고 나서는 좀 더 일이 수월해졌어요. 마감을 더 미룰 수는 없어서 이기도 했고요. (웃음) 아, 그런데 힘들었던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는 잘 마무리됐어요. 리포트는 말할 거 없이 예쁘고 사이트도 마음에 들고요. (웃음)


지현: 맞아요. 웹사이트 멋져요. (웃음) 이 프로젝트에서는 룰님이 참여자들의 목표를 맞춰가야 하는 입장이었죠?


룰: 8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잠깐 프리랜서로 6개월 정도 일하고 스티비에 입사했죠. 경력직 이직이었는데, 제가 어디까지 어떻게 해도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중간에 이직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매니저로서 후배를 끌고 가야 하는데, 이 회사는 처음이고 또 이 프로젝트도 처음이다 보니 어느 정도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가 어려웠어요.


지현: 그랬군요. 그러면 이전 회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나요?


룰: 이전 회사에서는 초기 멤버이고, 회사에서 하려는 목표와 방향을 저도 같이 정했어요. 후배나 인턴이 오면 누가 봐도 먼저 있었고 회사나 서비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은 사람이니 제가 이끌면 됐고요. 담당한 일에는 책임감이 큰 편이어서 ‘그럼 일단 결정을 내가 내리고, 내가 가서 확인받을게.’의 스타일로 일했던 것 같아요.


지현: 이전 회사에서는 팀의 리더 역할을 하셨던 거네요.


룰: 맞아요. 그렇죠. 저는 ‘내가 경험해보니 이런 건 진짜 싫다. 나는 저렇게 하지 말자.’의 리스트가 있는데 그중 나가 결정을 미루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결정을 내려야 했던 상황이 되면 되도록 빨리 결정을 내려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팀에 오고 나서는 내가 결정을 내려도 되는지의 고민을 너무 많이 했어요.

내가 처음 한 것도 아니고, 원래 만들던 결이나 톤이 있을 텐데. 한 달밖에 안된 내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도 되나 하고요. 이전 회사였다면 제가 결정하면 됐을 테니까.


지현: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 말고 지금 룰님이 맡고 있는 일에서는 그런 고민을 덜 하세요?


룰: 덜하죠. 크리에이터 트랙도 이름을 정할 때까지는 비슷한 고민을 했었어요. 스티비 입사 전에도 스티비가 보여주는 톤이 좋았어요. 그래서 입사 후, 크리에이터 트랙 이름을 정하면서 ‘내가 정해도 되나?’, ‘스티비 톤과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메일 마케팅 리포트와 비슷한 고민이지만, 크리에이터 트랙은 제가 입사하기 전에는 많이 활성화된 상태는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팀과 이야기한 뒤에는 제가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좀 더 수월했어요. 실무를 하고 있는 것도 브랜드 디자이너와 저니까 우리가 정해 나가면 된다, 내가 잘 운영해서 디자이너가 만든 이미지를 좀 멋있어 보이게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렵진 않았어요.





지현: 지금 들어보니까 룰님은 결정을 유보하는 게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룰님의 위치나 역할이 결정 나지 않은 상태로 흘러가는 걸 어려워하시는 걸까요?


룰: 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저는 고민이 되면 그냥 직접 물어봐요. 같이 일하던 상사에게도 제가 5, 6년 차쯤 됐을 때 “대표님, 저를 신뢰하시나요?”라고 물어본 적 있어요. 좀 청춘 드라마 같은 질문이라 하기 싫었는데, 직접 들어야겠더라고요.


지현: 뭐라고 하시던가요?


룰: 되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해주셨어요. 사실 그때, 상사 분이 너무 바쁘시고 결정이 너무 미뤄져서 일이 진행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결정을 내려도 될지, 이 사람이 나를 믿고 일을 시키는 건지, 아니면 손이 없어 시키는 건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 말이 뭐라고, 직접 신뢰한다고 듣고 나서부터는 좀 수월했어요. ‘아 이 사람이 나를 믿으니까, 내가 결정하면 되겠다. 우리가 잘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어요. 저는 제가 어떤 위치이고 역할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서로가 원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느낌으로 맞추기는 어렵거든요.


지현: 룰님은 빨리빨리 결정이 돼야 일을 진행할 때 속도를 내면서 일 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네요.


룰: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옆에서 생각이나 의견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좋아요. 지금 브랜드 디자이너랑 작업할 때 좋은 점이 제가 이렇게 할지 저렇게 할지 물어보면 디자이너 분이 솔직하게 의견을 잘 주세요. 디자이너가 탁탁탁 의견을 내니까 일도 탁탁탁. 진행이 좀 빨리되는?


지현: 오 약간 빠른 진행을 좋아하시나 봐요. 빨리 실행하고 피드백을 빨리 받아서 수정하는 이런 루틴을 선호하는군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리서치를 많이 해서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건너가다가 좀 삐끗하면 빨리 수정해서 가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룰: 아, 네네. 맞아요. 저는 후자인 편 같네요. 손이 좀 빠른 편이기도 하고 말로 설명하는 걸 좀 귀찮아해서인 것 같아요. 그동안 손으로 표현했던 결과물이 별로라는 얘기를 많이 안 듣기도 했고요. 그래서 말로 설명하면서 의견을 받는 것보다 결과물을 대충이라도 보여주고 아니면 아닌 거고, 고칠 건 고치는 게 일의 진행이 더 빠르더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덜 소모적이다라고 생각하고요.


지현: 그게 룰님의 노하우네요. 일하는 노하우.


룰: 저 좀 빨리 보여주지 않나요? (웃음) 처음부터 모든 의견을 듣고 일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생각하는 바를 빨리 이미지로 보여주면서 수정하는 게 커뮤니케이션이 더 수월할 거라고 생각해요.





지현: 1년 차와 10년 차의 다른 점을 물어봤을 때, 1년 차 때는 일을 하기 위해 이유를 많이 물어봤다면, 10년 차가 돼서는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고 답변하신 게 인상적이네요. 이유를 만든다는 게 사실 어렵잖아요. 약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게 10년 차의 바이브인가 이런 생각도 들고요. 이유를 만드는 방법 같은 게 혹시 있으세요?


룰: 생각해보면 1년 차 때는 이유가 좀 거창하길 바랬던 것 같아요. ‘나는 이만큼 하고 있는데, 이게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했는데, 10년 차가 되니까 굳이 이유를 듣지 않아도 이유가 예상되는 일이 많이 늘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이니까, 구체적으로 듣지 않아도 어렴풋하게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 싶어요. C레벨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달까? (웃음)

그럼에도 아무 이유 없이 일을 할 수는 없죠. 근데, 이유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예를 들면, 마케터는 일하다 보면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보이거나 나중에 필요 없을 것 같은 일도 배우고 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엑셀로  데이터를 정리한다던가 아니면 한 번도 안 써봤던 새로운 툴, 피그마를 배우고 있다거나 그런 일이요. 누군가는 그런 시간들을 아깝다고 느낄 수 있는데, 저는 약간 장을 담근다고 생각을 해요. 잘 담가 두면 나중에 쓰겠지 싶은 마음. 그냥 작은 것들에도 의미를 만드는 거죠.

옛날에는 큰 이유를 찾고 싶었는데, 지금은 작은 이유도 잘 찾아요. 이유가 없더라도 당장은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유를 발견한 경험들이 있거든요.  


지현: 거창한 이유가 아닌 작은 이유에도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차이일 수 있겠네요.


룰: 1년 차 때, 그러니까 어릴 때는 너무 잰 거죠. 내가 이걸 하면 어떤 걸 얻을 수 있을까, 이 자격증을 따면 이직할 때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이요. 그런 기술이나 이력이 있다고 내가 원하는 걸 얻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젠 알아서..., 그리고 이거 저거 재는 게 피곤하기도 하고요. 내가 재미있어서 한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게 꽤 괜찮으니까. 내 선택이 나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지는 않더라는 약간의 믿음이 있죠.


지현: 외적인 동기에 이제는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네요.


룰: 음,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이전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를 잘 되게 만들고 싶었어요. 내가 만드는 서비스를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로 만들고 싶다. 진짜 좋은 회사니까.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이루고 나오진 못한 것 같아요. 물론 제가 나왔어도 좋은 회사지만, 그래도 스스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니 회사를 성장시키고 싶다는 책임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고 할 수 있는 게 많더라고요. 제가 뭔가를 잘못한다고 해서 회사에 영향을 주진 않으니까, 그냥  혼자만 책임지면 되니까, 이거 저거 자유롭게 해 볼 수 있었고 그게 재밌었고 결과도 좋았어요. 그때 자신감을 많이 얻으면서 예전에 제가 했던 경험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끼게 됐어요.


지현: 일을 오래 하면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생기나 봐요.


룰: 스타트업에서 10년 구르면, 나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요. (웃음)





지현: 5년 후의 이루리, 그러니까 15년 차의 이루리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룰: 상상이 잘 안되네요. 가족 구성원이 지금과 동일하다면,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요즘 느끼는 것 중 하나는 흩어져 있던 점과 선들이 연결되고 모이는구나라는 생각이에요. 기존에 했던 기획, 운영, 마케팅 등 여러 경험들이 ‘스티비 마케팅 매니저'로 입사한 덕분에, 그리고 시간이 10년쯤 지나서 돌아보니 이어지고 같은 방향을 향하는 선이 되고 있었구나 싶어요. 이제는 그 선을 좀 더 굵게 만드는 일을 향후 5년 동안에는 하고 싶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현: 선을 굵게 만드는 일이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깊게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해요.


룰: 이전에는 디자인, 마케팅, 기획, 운영 이것저것 했잖아요. 그러다가 어쨌든 마케팅 매니저로 오면서 남이 부여해 준 이름인데도 마케팅 매니저라는 이름이 생기니까 ‘저는 마케터예요’라고 말할 때 되게 자신감이 생겨요.  

마케터지만 이전에 했던 경험들을 다 쓰고 있거든요. 지금보다 어릴 때는 그런 경험들이 모두 다른 일 같았어요. 데이터 보고 광고도 돌리고 콘텐츠 쓰고 영업하고 이런 모든 게 다 다른 일 같았는데 다 쓰이는 회사에 오니까 되게 좋은 거예요.

만약 제가 퍼포먼스 마케터나 콘텐츠 마케터였다면 이 역량을 다 못 쓸을 텐데 다행히 여러 가지 했던 걸 모아서 할 수 있는 회사에 온 거죠.


지현: 다양한 경험들이 지금 팀에서는 도움이 많이 되고 있군요.


룰: 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이루리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글쓰기, 독립출판, 에세이, 외부 글 기고 등 어쩌다 보니 했던 것들이 모여서 저를 글 쓰는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이 생기더라고요. 노션이나 엑셀 때문에 생산성 관련된 걸 저에게 배우고 싶은 사람도 생기고요. 그런데 그렇게 찾아오는 키워드가 저도 바라던 키워드예요. 그래서 이렇게 연결된 일들을 잘 키워가면 5년 후에는 그 키워드들이 좀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결된 선을 굵게 만드는 일이란 이런 것을 의미해요. 남들이 나를 발견했으면 하는 키워드를 잘 키워보자.

근래에 와서 바뀐 생각이 있는데, 저는 자기 PR 하는 걸 좀 부끄러워했던 것 같아요. 뭐, 안 한 건 아닌데, 페이스북에 올리는 정도였거든요. 최근에 내 경험을 나부터 소중하게 생각하고 말해야 사람들이 알아봐 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조금씩 계속 공유를 하다 보니 글쓰기 키워드를 통해서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입사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메일’과 ‘툴’이라는 키워드가 저랑 되게 잘 맞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지현: 어떻게 보면 5년 전에 룰님이 만들었던 갈래들이 모여서 지금의 글쓰기, 생산성 같은 키워드가 됐고, 5년 후에는 또 지금 만들어진 글쓰기나 생산성이 모여서 또 하나의 키워드를 만드는 거군요.


룰: 그래야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예전 회사에서 강의를 많이 했는데 누군가 저에게 강의를 부탁하려고 하면 뭘 부탁해도 수 있을 것 같은데, 뭘 부탁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근데 지금은 제안 오는 게 글쓰기, 노션, 뉴스레터처럼 뚜렷하게 주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지현: 룰님은 이렇게 딱 정확한 거나 확실한 것을 좋아하시나 봐요.


룰: 네 맞아요. 그런데 말은 또 그렇지 않지 않나요? (웃음)


지현: 아니에요. (웃음)


룰: 사실 좋아해요. 파일 정리를 할 때도 너무 겹치지 않도록 정리가 되는 게 좋고, 짐 쌀 때도 약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게 좋아요. 의견을 말할 때도 그렇고요.





지현: 마케터로서의 룰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룰이 좋아하는 걸 물어봤을 때, 여름과 물을 얘기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여 주셨어요. ‘될 대로 돼라.’의 느낌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면 계절 중에 여름이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너무 더우니까 ‘아 모르겠어. 될 대로 되라지.’ 이런 느낌으로.


룰: 저는 여름이랑 물을 좋아하는데요. 답변을 하다가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하고 있는 일에서는 분명한 게 너무 좋거든요. 학교에서도 주로 조장을 많이 하는 사람 있잖아요. 이게 조장을 하고 싶어서 한다기보다 결정이 안 내려지는 게 싫어서 ‘그냥 그럼 내가 할게.’하면서 하게 되는 사람이요.


지현: 아 그게 룰님이구나.


룰: 문서를 쓸 때도 저는 사람 성격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리스트를 불릿 포인트를 이용해 나열할 때, 불릿 포인트 서식을 어떻게든 쓰는 사람과 그냥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직접 1, 2, 3으로 쓰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전자거든요. 그렇다 보니 일을 할 때는 ‘될 대로 돼라.’가 잘 없는 거예요.

그런데 물에는 아무것도 안 들고 들어가게 되고 한 번 젖으면 그 뒤부터는 그냥 놀잖아요. 저는 그런 기분을 좋아해서 계절 중에는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여름이 좋아요. 그리고 지현님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제가 사람들이 술 취한 것, 술 취해서 새벽에 내일이 없을 것 같이 노는 그런 분위기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뭘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냥 ‘될 대로 돼라의 분위기를 좋아하나 보다.’는 생각을 했죠.


지현: 일하면서의 룰님은 정확한 반면, 일하지 않는 평소의 룰님은 ‘될 대로 돼라.’ 이렇게 분리가 되나 보네요.


룰: 그런데 사실 일상에서도 그렇진 못해요. 될 대로 돼라가.


지현: 그 본성이란 게 있잖아요. 어쨌든 타고난 성질이 정확한 사람이면 ‘될 대로 돼라.’고 해도 그런 성질이 없는 사람과는 좀 차이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룰: 일할 때, 꼼꼼하고 정확하고 싶어 하는 편이지만, 사실 더 꼼꼼하고 정확한 사람들을 만나면 당황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답변을 하다 보면 내가 정확하다고 말해도 되는지, 또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생각하는 나처럼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음, 뭔가 다 상대적인 것 같아요. 될 대로 되라고 해도 제가 막 차를 부수고 그러진 않을 테니까. (웃음)


지현: 물론 그렇겠죠. 제가 친구들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 ‘그냥 대충 해'라고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프로세스상 ‘대충'의 범위가 0부터 100까지는 아니거든요. 한 90에서 100 사이인 거죠. 룰님이 생각한 어떤 퍼센트 안에서의 ‘될 대로 돼라.'가 사실 남들이 봤을 때는 정확하게 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룰: (끄덕끄덕)


지현: 재밌는 표현이었어요. 여름이랑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확 든 것도 신기했고요. 그럼 여름에 룰님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예요? 물에 들어가서 수영할 때인가?


룰: 아니 물에 들어가는 수영은 여름이 아니어도 행복해요. 겨울에 온천 가서도 행복해요.


지현: 그냥 물에 들어가는 거를 좋아하시는 분.


룰: 맞아요. 음, 여름에 가장 행복한 것은 마트에서 복숭아가 나온 거를 발견할 때가 되게 좋은. 진짜 여름이 시작된 걸 느끼게 되거든요. 그때 약간 설레는 것 같은데, 천도복숭아를 좋아하거든요.


지현: 천도복숭아를 좋아하시는군요.


룰: 비빔면이랑 천도복숭아요. 비빔면은 오뚜기, 복숭아는 딱복.





멀리서 봤을 때는 비슷해 보였던 룰님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비슷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달랐을 때 느끼는 낯섦보다는 룰님의 사적인 면을 구경한 듯한 느낌이 좋았다. 일 할 때는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하지만, 직장인이 아닌 이루리로서는 약간은 느슨하게 지내는 느낌.


자신의 앞에 놓인 키워드를 발견하고 가꾸는 게 룰님의 노하우가 아닐까. 지금의 룰님의 경험들이 앞으로 5년 뒤에 또 어떤 키워드가 되어 빛날지 기대된다.





이 인터뷰는 NEWGROUND의 한 발짝 곁에 서는 인터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결과물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데 많은 도움과 지지를 보내주셨던 미란님과 인터뷰에 선뜻 참여해주시고, 교정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저의 첫 인터뷰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 미란님의 프로그램 후기글은 요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네가 느끼는 게 맞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