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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위나 Jan 17. 2021

대단하지 않지만 동네한의원입니다.





 둔탁한 손가락이 연보라색 앙고라 털이 수북한 스웨터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조심스럽게 풀어헤친다. 지체되는 박자 없이 하나하나 풀어지는 단추가 아들의 손놀림이 익숙함을 증명한다. 구순의 어미는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몸을 아들에게 맡기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아들의 어깨너머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이제 누우셔요."

 아들은 유유히 치료실 밖으로 사라진다.  

 "오셨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고요?"

 "어, 나야 별고 없지. 집이는 재미 좋으셔?"

 "하하 네네."

 구순의 할머니 환자분의 재미 좋으냐는, 처음 들었을 땐 생소해서 당황했던, 이젠 익숙하고 뭔가 내밀하면서도 친숙한 느낌의 인사에 반갑게 대답한다. 

 오랜만에 내원한 어르신은 안 아픈 데가 없다면서 여기저기 손으로 가리킨다. 가리키는 곳마다 침을 놔드린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치료가 끝나자 아들은 다시 치료실로 들어가 아까의 필름을 거꾸로 돌린 듯 능숙하게 스웨터를 입히고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고 조심스럽게 어르신을 부축해서 치료실을 퇴실한다.

 "토요일 날도 하지?"

 아드님과 함께 오시려는지 진료일자를 확인하고 가신다.

 지난한 세월의 무게에 굽은 뒷모습이 단아하고 경건하다.






 나는 조그마한 동네 한의원을 한다.

 1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한의원을 하다 보니 해마다 때가 되면 찾아오시는 할머니 환자분들이 종종 계시다. 몇 달 만에 오셔도, 1년 또는 몇 년 만에 오셔도 엊그제 오셨건 것처럼, 동네 노인방에 매일 오던 것처럼, 익숙하게 친숙하게 그렇게 치료받다 가신다. 며칠 내리 오시다가 또 언제 오는지 기약도 없이 뜸하신다. 꽃다운 젊은 시절에 꽃을 피웠는지도 모르게 출산과 노동에 육체를 소모하고, 가정의 안일을 위해 긴 세월 가슴에 비바람을 가둬놓고 허리는 구부러지고 어깨는 단단해진 그분들이 누워계시면 나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구릿빛 피부에 마른 체형, 얼굴에 유선형의 주름들이 선명한 그분은 말수도 적고 그저 재미 좋으냐는 안부와 몇 군데 아픈 곳만 말씀하시던 분이다.  몇 년 전 아침 출근이 늦은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분이 오랜만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침을 맞으시면서 한마디를 하신다. "집이 여서 멀우?"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한 그 음성은 나로 하여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이후에 오실 때마다 난 더욱 공손하게 아픈 데를 빠뜨리지 않고 봐 드린다. 몇 년 걸쳐 방문을 하시다 보니 사뭇 조손 관계라고 할만한 눈웃음이 오고 간다. (이건 나만의 착각일 수도...ㅎㅎ) 보호자와 동행하여 내원하실 정도로 노환이 깊어지셨지만 다음 계절에도 오늘처럼 재미 좋으냐는 말을 듣고 싶다.






 나는 대단하지 않은 한의원을 하고 있다.

 졸업한 지 20여 년을 지나온 동안 나는 온전히 전문인으로 살지는 못했다. 세 아이를 출산하면서 중간에 일을 쉬기도 했고,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도 아이들과 집안에 신경을 쓰느라 한의원에 쏟아붓는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린 대로 커서는 큰대로 신경 쓸데가 많았다. 세 아이중 한 명은 장애아였다. 한의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시방석 같은 나날도 있었다.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병환이 깊어지고 때로는 나의 건강도 돌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이 쌓이고 그럴수록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도 쌓여갔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한의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은 단지 그저 그런 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젊은 날의 열정을 다 쏟아내고 이제는 겨울 햇살에 한가로이 일광욕하는 고목이 되신 부모님들이었고, 가장 역할에 충실하느라 본인을 돌보지 못한 채 배 둘레길이만 증가한 남편들이었으며 육아와 가사와 일에 치여 지치고 지친 아내들은 바로 나였다. 때로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오는 아이들조차 나의 아이들이었다. 환자들이 타인이 아닌 나와 가족과 같다고 깨닫게 되면서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어렴풋하게 알아가고 있다.

 한의원에 특별한 시설이나 대단한 기술은 없다. 그저 지나가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한의원이다. 아픈 곳을 꾹꾹 눌러가며 침을 놓고 상황에 따라 한약도 물론 투여하지만 침과 한약만큼이나 아픈 곳을 다독여주는 무언의 유대감이 자리하는 곳이다.

 아픈 곳을 보면 그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다. 인생의 길 위에서 지쳐 잠시 쉬었다 가는 환자를 오늘도 나는 외면하지 않는다.

 







 

 브런치 작가를 시작하면서 한의원에 대한 이야기를 쓸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시(詩)에 대한 생각뿐이었죠.

 그러다 최근에 어느 작가님이 직업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답 댓글을 주셔서 한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많은 수정을 거쳤는데 잘라낸 글들은 따로 서랍에 두었다가 매거진에 천천히 하나씩 발행을 할 계획입니다.

 건강칼럼들은 이미 정보의 바다를 이루고 있고, 여타 훌륭한 의료인들께서 많은 글들을 남겨주셨기 때문에 저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환자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중심으로 발행할까 합니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한꺼번에 세 개의 매거진을 내놨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매거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더욱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는 계기가 되겠지요.

 기본기 없는 실력으로(저 이과생 ㅠ) 한 땀 한 땀 힘겹게 짜낸 글들을 봐주시고 좋아해 주시고 구독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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