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디즈니랜드 총격 사건 구제 작전을 위한 지침서

시리즈: 국제시간여행자연합 ITA

by 그린

“개소리를 길게도 써 놨네…….”


태블릿의 스크롤을 끝까지 내린 해솔이 중얼거렸다.


중국 지부와 싱가포르 지부에서 보내온 읍소문은 한결같았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 지부에 가용 인원이 없어, 사회적 혼란을 좌시할 수 없으나 손이 너무나 모자란 상황이라…….


공손한 말투로 한국 지부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대신 이번 일을 떠맡아 준다면 정말 고맙겠노라는 것이었다.


“리 치앙 이 양반이 웬일로 이렇게 닭살 돋는 말투인가 했더니, 생각해 보니까 결국 같은 싱가포르 지부 출신이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농담 조의 한탄을 내뱉은 연수 형이 태블릿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싱가포르 지부에 전해야겠다. 다음에 열 배 스무 배로 뽑아먹을 테니까 각오하라고. 우리는 일단 조사부터 해 보자.”


-


무척 의외로, 또는 예상대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귀찮은 일이니 얼른 끝내고 치워 버리자는 모두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연수 형이 아시아 연합본부 측과의 의사소통을 담당했고, 다현과 해솔은 사건과 관련한 전반적인 정보를 수집했다. 나는 이번 사건이 ‘만물의 눈’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 조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효신은 외신과 현지 언론에서의 정보를 수집하느라 바빴다. 물론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이렇게 덧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홍콩에 놀러 가고 싶은 거였지 이런 식으로 가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역할이 잘 분배된 조별과제처럼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끝난 작업 덕에, 우리는 사전 조사관이 작성한 지침서를 받아들기도 전에 이미 사건과 관련한 상당한 양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범인은 6인의 남성. 1명은 총기 난사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명은 경찰 당국에 붙잡혔으며 나머지 2명은 행방이 묘연했다. 체포된 3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가 주동자라고 증언했다. 인터넷 음지 커뮤니티에서 만난 이들이 비밀리에 메신저로 동반 자살을 모의했고, 그 남자의 주도로 사제 총기를 디즈니랜드 내에 밀반입해 총격 사건을 일으킨 후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계획이었다고.


“진짜 이런 커뮤니티 같은 게 있다고? 범죄 프로그램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어.”


“뭐, 우리 하는 일도 범죄 프로그램이랑 별반 다를 거 없긴 해요. 우리는 방송을 안 할 뿐이지.”


“그럼 그 체포된 3명은 왜 안 죽은 거예요?”


간단했다. 총기 난사 도중 조악한 사제 총기가 작동을 멈추었고, 그 틈에 체포되어 미처 죽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도망친 2명은 뭐지 그럼?”


“그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뭐.”


그러니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만물의 눈’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반쯤은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음지에서 모의된 조악한 사람들의 조악한 범행.


바로 그 점이 우리의 의욕을 한풀 꺾어 놓았다.


“이걸 작전씩이나 나가야 해? 그냥 과거에서 그 인터넷 카페 찾아서 미리 신고하면 안 돼?”


해솔의 투덜거림에 다현이 답했다.


“만난 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건 사적 메신저라 과거에서 미리 잡아내고 싶어도 증거가 없어. 현장에서 총기 소지로 신고하는 게 최선이긴 해.”


“그래, 우리가 그 사람들 일일이 찾아내서 핸드폰 강제로 뺏은 다음 경찰에 제출할 수도 없잖아.” 연수 형이 거들었다.


띠링.


그때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그만 좀 들었으면 싶은 소리였다.


해솔이 헛웃음을 쳤다. “설마 지침서야? 빨리도 뜬다.”


연수 형이 재미있다는 듯 빙글 웃으며 태블릿으로 손을 뻗었다.


“어디 우리가 조사한 거랑 얼마나 맞는지 좀 볼까.”


연수 형의 긴 손가락을 따라 태블릿 화면이 바뀌었다.


정제된 글자가 화면 맨 위에 드러났다.


- 지금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합니까?


“음?” 연수 형이 의문 섞인 짧은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태블릿 가까이 모여들었다. 방금 우리가 본 것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연수 형이 살짝 스크롤을 내리자 다른 글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 주변에 누군가 있지 않은지 확인하십시오.


방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차가운 표정의 해솔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동작에 되레 놀란 효신이 해솔을 나무랐다. “아, 뭘 또 뒤를 보고 있어 찝찝하게?”


“아니, 신경쓰이잖아.” 해솔이 덤덤히 답했다.


연수 형이 난감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린 채 미소를 지었다. “....... 지침서 맞나 이거?”


“수신인이 형 앞으로 되어 있는데, 설마 형 혼자 보라는 뜻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 지부장 대내문서하고는 형식도 달라.”


연수 형은 망설임 없이 휙 스크롤을 내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뭐 너희한테 숨길 대단한 비밀이 있다고.”


지침서인 듯 아닌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서는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셨습니까?

본 문서의 확인은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갑습니다, ITA 한국 지부 여러분.

홍콩 디즈니랜드 총격 사건의 사전 조사를 맡은 조사관, 라니아 클라크입니다.


공식 지침서 발행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한국 지부의 문서함에 직통으로 서신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작성해 두었던 지침서를 제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 무단으로 열람한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제 문서에 누군가 손을 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과도한 예민함, 또는 편집증적 증세라 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불확실한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합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비공식적인 방법을 택하는 점 양해를 바랍니다.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미 언론을 통해 충분히 접하셨을 테니 간략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20XX년 6월 11일 오후 14시 20분 경, 홍콩의 디즈니랜드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6인의 남성이며 이들의 총격으로 인해 40여 명의 시민이 숨지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이 총기를 놀이공원 안에 밀반입한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본 작전의 목표는 범행 직전 이들을 총기 소지로 신고하여 현지 경찰 당국에 인계함으로써 총격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사망한 남성과 체포된 남성 3인의 신상 정보는 별첨 문서에 적혀 있으나, 도주한 남성 2인에 관한 정보는 아직 수집된 바가 없으므로 현장에서 해당 남성들을 함께 적발하여 검거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작전 수행 시 아래의 수칙을 참고하십시오.


1. 트리거를 시행하여 6월 11일로 진입하십시오. 오후 13시 또는 그 인근의 시간대에 맞추어 디즈니랜드에서 미리 대기하십시오.

총격 사건은 투모로우 랜드와 홍콩 디즈니랜드 캐슬 허브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였습니다. 해당 공간 인근에서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인 채 후술할 항목에서 언급한 특징을 지닌 남자들을 찾아내십시오.


2. 캐릭터 가면을 쓴 남성들을 유의 깊게 살피십시오.

범행 당시 범인들은 디즈니 캐릭터 또는 기타 만화영화 주인공 캐릭터의 가면을 착용하여 얼굴을 가린 상태였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총기와 비슷한 크기의 짐을 들고 있는 남성이 없는지 주시하십시오.

주: 체포된 남성 3인은 각각 스파이더맨, 스크림, 헐크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2-1. 참고 차 말씀드립니다. 놀이공원 내에 디즈니 캐릭터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스태프들이 다수 있을 것입니다. 디즈니랜드에서는 동시간대에 동일한 디즈니 캐릭터가 두 명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같은 시간대에는 오직 한 명의 캐릭터만이 등장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캐릭터를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시 목격하였다면 의심하십시오.


3. 퍼레이드를 찾아다니십시오.

사건 당시 발생 장소 인근에서는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가족 단위 관광객이 군집되어 인파를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범인들이 사람이 밀집된 곳에서의 범행을 위해 고의적으로 해당 장소를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퍼레이드 인근을 특히 주의하여 수색하십시오.


4. 신고를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들키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발견되었거나 인상착의가 본 문서에 서술된 것과 비슷한 남성을 마주할 경우 지체 없이 경찰 당국에 신고를 진행하십시오. 신중을 기하고자 시간을 끌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총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수틀리면 총기가 언제 누구를 향해 발사될지 모른다는 점을 명심하시어, 여러분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여러분이 그들을 신고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5. 도주한 남성들의 신상을 확보해 주십시오.

인상착의, 생김새, 신체 특징 등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단서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 주십시오. 혹여 1차 작전으로 해당 사건이 구제되지 않을 경우, 뒤이을 추가 작전들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6. 가급적 유효 사거리 안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범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사제 총기는 그 위력이 정식 총기만큼은 못하나, 반경 7m에서 10m 내의 대상에게는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단 용의자 식별에 성공하면 그 뒤로는 가급적 해당 용의자들에게서 최소 10m 이상 떨어진 거리에 머무르며 신고한 뒤 그들을 주시하십시오.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그들을 직접 제압하려 시도하지 마십시오. 타임워킹은 분명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결코 불사를 담보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참고하실 만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든 지침서에 동일하게 적혀 있는 문구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지침서의 내용이 유출, 훼손, 조작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지체 없이 제게 문의하십시오.


무탈한 모습으로 현재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과실이 있는 곳에 책임도 있나니,

당신의 시간에 행운이 깃들기를. 단결.


- 오세아니아 연합본부 소속 사전 조사관, 라니아 클라크 드림.


-


“....... 오세아니아 연합본부 소속?”


문서 말미에 등장한 의외의 직함에 효신이 아리송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지침서를 끝까지 열람한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오세아니아 연합본부 소속 사전 조사관이 홍콩에서 일어난 사고의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을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누군가 문서를 열람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어느 것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연수 형의 강점이었다.


“지침서까지 나왔으니까 일단 작전 참여 인원부터 정해 보자. 이번 작전은 나랑 효신이, 해솔이가 같이 가자. 세민이는 백업 서 주고, 다현이가 백업 보조 같이 서 주고.”


물 흐르듯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배정하는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거역하지 못할 힘이 있었다.


“신속하게 끝내고 손 떼자고.”


연수 형의 말에 효신은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벽 쪽으로 힐끔 시선을 준 연수 형이 바람결처럼 가벼운 투로 말했다.


“오늘이 13일이지? 작전은 14일로 하자. 내일 이 시간에, 트리거에 필요한 물품 지참해서 여기서 만나.”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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