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_05
금요일 새벽. 출근 전. 울리는 알람에 중단 버튼을 누르고 나서, 나는 문득 한라산을 오르고 싶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잡고 렌터카를 선택하고, 이른 퇴근 후 김포 공항에 도착한 나는 지금 빠르게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글을 쓴다. 그림 그릴 재료도 없고 아이패드도 없고 그냥 아이폰이랑, 오 지금 비행기가 떴다, 내의랑 등산화랑 얇은 비닐 가방만 챙겼다. 오늘따라 비행기는 하나도 무섭, 아니 조금 무섭고, 미리 다운로드해 둔 음악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숨을 길게 쉬고 있다.
나는 나에게 엄격한 편이다. 남이 해주는 칭찬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식은땀이 나며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나는 온전히 나만이 칭찬할 수 있는 존재인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요새 칭찬이 뜸했다. 아니. 오히려 왜 저러고 사는지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가 나를 말이다. 나는 요새 내가 알맹이 없이 부스러기로 만들어진 형체라 바람 한 줌에 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온통 부질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낡은 프리지어처럼 향기 없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영원히 퍼즐 하나가 빠져 불완전한 존재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게 칭찬을 받고 싶다. 칭찬이 필요하다. 정말 필요하다. 잘 살고 있다고. 너 대단하다고. 아직 젊다고. 너 그 정도면 조만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믿을 만하다는. 그런 말들을 내게 듣고 싶다.
비행기는 이제 광주를 지나고 있다. 에어팟을 잠시 끄고 둘러보니 어린이들은 신이 났고 어른들은 열심히 흔들리는 비행기 시트에 걱정스럽게 잠겨 있다. 나는 박음질된 선로를 따라가는 헝겊 배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마음이 편하다.
한라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는가? 생각보다 힘들다. 평소에 하지 않는 욕도 길고 가파른 계단 앞에 서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한 발 더. 다시 한 발 더 디디고 오른다. 중간에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고 맑은 공기에 정신이 아찔해질 것만 같지만, 사실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힘들게 기어 올라간다. 하늘에 닿을수록 힘들다. 세 발짝 가고 하늘 보고 한숨 한 번. 다시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간간이 있는 평지를 무빙워크 마냥 빠르게 지나가면, 다시 또 계단이 기다린다. 그렇게 오르다 보면 오르는 행위가 익숙해진다. 힘든 것도 익숙해지고 쉬는 것도 익숙해지고 쓰러질 것 같은데도 찔끔찔끔 오르는 자신에게 익숙해진다. 그러면 절로 칭찬할 수밖에 없다. 기어코 오르는 내가 대견할 수밖에 없다. 이게 익숙해진다고? 아니 너덜너덜해졌는데도 움직이네? 하고 말이다.
착륙을 위해 대기를 찢고 내려가는 비행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박음질이 풀렸나. 잠깐 밖을 보니 파도가 바닥에 난 작은 흠집처럼 멈춰있다. 멀리서 보면 저렇게 아무것도 아닌 흠집이 가까이서 보면 쉬지 않고 요동치는 파도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에서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진동이라 말했다. 세포가 끊임없이 분열되고 생성되듯 사람도 쉼 없이 진동해야 살아있다고 보았다. 진동하는 사람만이 칭찬받을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은 밤바다를 보며 미역처럼 널브러져 있다, 내일 새벽 오랜만에 한라산을 다시 오를 것이다. 오르는 나에게 익숙해질 것이고 너덜너덜한 나를 칭찬할 것이다. 산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이들에게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해줄 것이다. 사실은 엄청 많이 남아서, 아까 그 아저씨 생긴 대로 거짓말 쳤다고 이를 갈게 하고 싶다. 나도 당해 봤는데 생각보다 분노가 등산에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분노는 정상에 오르면 다 사라질 테니까, 분한 만큼 기분 좋을 테니까 말이다. 속이는 재미에 따르는 죄책감은 그렇게 무마하자. 이제 비행기 문이 열리고 짐을 들고 내린다. 공항을 나서니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다. 칭찬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그래서, 한라산 정상에 오른 적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