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삶이 전자 이미지로 철저하게 중계되면서 우리는 남들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다른 이들의 행동이, 그리고 우리 자신의 행동이 지금 기록되어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전송되거나 혹은 훗날 철저한 검토를 위해 저장되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찍습니다. 콘서트에 간 사람들은 셀카를 찍는데 이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 됩니다.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경험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경험'이지요. 마치 '오, 이건 사진으로 찍어야 해. 그래야 사진을 올리고 온갖 댓글을 받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근시사회>에서 꼬집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 자기애 증상은 놀랍게도 근 5년간 변해온 새로운 나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적이 종종 있긴 했지만.
IT업계 디자이너로써 최신 트렌드들을 팔로업하고 있으며 정치/사회 이슈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양인, 그러면서도 가끔 소소한 아재개그에도 웃음을 날려주며 비주류 문화에도 문외한은 아닌 힙한 사람. 나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이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보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습게도 나의 모든 활동에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SNS에 포스팅하는 선별된 사진과 글들로 나의 '정체성'을 '완성'해간다. 페이스북 '좋아요' 하나도 허투루 누르지 않는다. 나의 '좋아요' 활동은 다른 사람의 피드에 공개되고, 그 '좋아요'는 결국 나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매개체가 되니까.
어제는 남자친구와 딸기 담금주를 만들었다. 딸기주를 만들기로는 일주일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이것들을 SNS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만드는 과정을 찍은 사진/영상, 완성된 사진, 그리고 한 달 후 이 딸기주가 완성되었을 때 딸기주와 함께 벚꽃놀이를 즐기는 사진은 얼마나 멋져 보일까! 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나란 사람 정말 속물적인 인간이네. 새삼 놀랍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물론 과거에 비해 사진을 찍기 위한 도구가 성능도 좋아지며 동시에 가지고 다니기 쉬운 형태가 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든다. 어쩌면 그 사진으로 인해 늘어나는 '좋아요'와 '댓글', 그리고 '타인의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활용하여 컨텐츠를 생산하고, 타인의 삶을 소비하는 데 익숙한 세대니까.
사실 갈수록 우리는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개인적 진보나 사회적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여긴다. 우리는 자아 표출을 남들이 소비하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 더 본질적으로는, 이렇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포맷은 근본적으로 충동 사회의 핵심인 자만심을 정당화한다. 즉 자아가 만물의 척도이며, '무엇이든'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를 더 부각시키는 것이 개인의 성공으로 통한다.
정체성 자체도 반복적인 상호작용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터클은 이를 '협력적 자아'라고 부른다. 반면 사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서 우리가 지녔던 능력은 사라졌다. "이제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능력을 키울 수가 없다"라고 터클은 지적했다. 충동 사회가 독립성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해도, 우리는 진정으로 혼자 서는 능력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모순적인 부분은, 자아가 확대되면서 비교적 사회는 축소되었으나 그 확대된 자아조차도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지만, 나는 스스로 사유하고 발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 약속도 없는 지난 주말,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번갈아 쓰며 시간을 보냈다. 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자극이 없으면 허전한 마음이 들어 끊임없이 자극을 찾아 헤맸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이미 다 봤던 것들만 있는데도 계속해서 새로고침을 하고, 유튜브에 들어가서 볼만한 영상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문득 모든 것을 다 치워버리고 의자에 앉아 방의 적막감을 느껴보았다. 텅 빈 방에 혼자 있는 나를 느끼고,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혼잣말을 해봤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금세 적응이 됐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와의 시간을 가졌다.
내 삶에서 어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일단 카톡과 SNS로 지인들에게 알린다. 그리고 네이버를 열어 유사한 사례를 끊임없이 찾아본다. 수십, 수백 명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비로소 해결책을 찾는다. 곧 다가올 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이렇게 검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미처 문제를 파악하기도 전에 해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능력은 이미 오래 전에 잃고,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마저 잃게 되는 시대. 우리의 시대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