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한 달만에 휴학을 말하다

박사과정의 잡동사니 2-1

by 우은지

2019년 9월 1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 28일, 지도 교수님께 휴학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나의 첫번째 잡동사니는 바로, 입학 한 달 만에 내지른 휴학 프레젠테이션이다.

화면 캡처 2025-02-20 153040.jpg


2017년 9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석사과정을 마쳤던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이어갈 참이었다. 석사과정 동안 100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냈던 탓일까. 박사 첫 학기에 나는 왜 휴학을 말해야 했을까.



휴학 프레젠테이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슬라이드1.JPG
슬라이드2.JPG
휴학 프레젠테이션 파일의 슬라이드 (일부 내용은 가렸다)

첫번째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나에게 박사학위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박사학위는 왜 필요한가.


석사과정 동안 운좋게도 좋은 선배와 교수님 덕분에 연구 경험과 프로젝트 경험을 다양하게 쌓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현장 경험 쌓기: 내가 연구 주제로 삼고 있는 문제들이 현장에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 문제를 연구로 다루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논문이 아닌 직접 경험으로. 연구를 위해서든, 진로를 위해서든 말이다.

개인 브랜드 높이기: 내가 이 분야에서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학교나 지도교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부딪혀 보며 설명하고 싶었다. 포르폴리오 쌓고, 사람을 만나고, 견문을 넓히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1년간 휴학해 박사자격시험을 보기 전까지, 지역 소셜벤처에서 1년간 일하며 연구 주제를 현장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그동안의 연구와 프로젝트 실적을 대중적인 컨텐츠로 다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주목하는 나의 역량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2019년 상반기, 석사 마지막 학기를 돌이켜보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석사 디펜스와 박사 입시 준비, 국제학회 발표 준비가 동시에 몰려 있었다. 특히 박사 입시 서류인 박사학위논문계획서를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나니, 이 열정을 어느 방향으로 쏟아야 할지 막막해졌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문제로 태클하고 있는 것이 현장에서 실재하는 문제인지?

그리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오롯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박사 첫 학기, 그런 막연함과 불안감이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이 불안은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었다.

스크린샷 2026-01-04 170941.png 새삼 열심히 살았었군,


이 질문은 박사과정에 들어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경험한 것은, 내가 소속된 조직이 나를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어떤 역량을 쌓아가고 있는지, 어떤 임팩트를 내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가 지금 뭘 잘하고 있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결국 퇴사를 선택했다.


2017년 가을부터 2019년 봄까지의 석사과정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지도교수님과 선배들과 함께 연구하며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여전히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무엇인지, 내가 어떤 기여하고 있는지,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석사연구 역시 도시재생지역의 상인 참여 관련 연구였지만, 현장을 관찰해 학술적으로 페이퍼를 쓰는 것이 과연 어떤 임팩트를 줄 수 있는지 확신이 부족했다. 누군가 이 페이퍼를 읽고 '얘는 현장도 잘 모르고 탁상공론하네'라고 말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특히 "내가 살아가는 커뮤니티에 기여하고 싶어 박사라는 진로를 선택"했기에, 이 탐색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연구실의 프로젝트나 수업에 끌려 떠밀리듯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직접 현장에 나가 탐색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지도교수님과의 면담에서 패배(?)했고 설득에 실패했다. 휴학은 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때 교수님을 설득하기 위해 했던 치열한 고민은, 이후의 나를 분명히 성장시켰다. 박사과정을 하는 내내, 이 질문들이 내 마음 한켠 어딘가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브런치 글을 연재하기 위해 드랍박스를 뒤적이다, "아 맞다 나 첫학기에 휴학하려고 했지"하고 깨달았을 정도로, 이 사건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럼에도 2026년 지금의 내가 2019년에 썼던 휴학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읽어보면, 휴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다뤄오고 있었던 것 같다. 휴학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의 질문만큼은 내려놓지 않은 채로 말이다.


가끔은 열정 가득히 무대포로 앞으로 직진하며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급브레이크를 밟고 치열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박사과정의 시작에 한 번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경험이, 이후의 영겁의 시간을 버텨낼 힘이 되어주었을지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사과정의 잡동사니 시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