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첫 직장 선배, 동기와 점심을 먹었다. 실없고 짓궂은 농담을 곁들이며 각자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대화 주제가 '꾸준함'에 머물렀다.
우리가 만났던 첫 직장은 나름 유명한 IT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좋은 대학,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그냥저냥 일하고 사는거지 하지만 평균 이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여 밤늦게도 건물을 환하게 밝혔다.하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도 늘 놀고만 싶다, 쉬고만 싶다를 외쳐대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번 만남에도 어김없이 서로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을 이어나갔다.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학부형에게 영어는 사실 본인이 잘하고 싶은 것 아니냐며 본인은 전화영어조차 꾸준히 안 하면서 왜 영어 숙제 하기 싫다는 아이를 이해해주지 못하냐며 짓궂게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과거 팀장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가 같은 팀이었던 시절, 팀장님이셨던 A님의 아이가 최근 용인외대부고를 입학했는데 알고보니 그 팀장님이 최근까지도 매일 아침마다 전화영어를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공부를 꾸준히 하니, 아이도 그걸 본받아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고, 서울에서 분당까지 매일 출퇴근에 팀원들보다 늘 일찍오셨던 팀장님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아이도 배운 게 아니겠냐고.
결국 우리가 회사에서 보던 그 많은 사람들은 그냥 좋은 스펙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는 힘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대단한 건 이미 오랜 시간을 꾸준하게 살아오고 꾸준함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경험이 있어서 본인만의 노련함으로 또 다시 새로운 것을 그냥 그렇게 꾸준히 해내고야 말고, 결국 또 그렇게 잘 성취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제발 올해는 뭐든 해보자고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서로에게 말하며 헤어지는 길에 문득 취직 후 1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돌아보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꾸준함 보다는 새로움이 나의 모토였던 것 같다. 조금만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있거나 답답한 상황에 봉착하면 다른 대안을 찾는 데에 열심이었다. 열심은 있었지만 꾸준함은 없었다. 불편해도 꾸준히 마주하는 것 잘 못해도 그냥 해보는 것. 그게 나에게 없었던 것 같다. 어떤 시점엔 남들보다 빨라 보이기도 하고, 좀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난 늘 피해다니고 도망다녔던 것 같다.
10년 여의 시간이 지나보니, 학교가 아닌 사회 속에서 내가 마주하며 내 힘으로 해결하려다 실패하고 피해간 꽤 많은 사건과 상황들이 알아서 잘 해결되었던 것 같다. 애써 증명하려던 진실이나 사람들의 인정도 내 수고와 노력이 무색하게 시간 흐르니 그냥 티가 나게 된다. 그래서일까. 남들은 진작 마주하고 기다리고 하던 것들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작은 가시, 조그만 언덕에도 지름길을 찾고 뛰어가던 내가 전보다도 제법 높아진 언덕과 조금 더 흐릿해진 상황에도 그 어떤 때를 기다리며 그냥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보고 그냥 참아도 보고 한번 울어도 보며 그냥 또 출근도 하고 하기 싫어도 일 해보고 하는 것 같다. 누군가 이미 터득한 꾸준함일지라도 이제라도 한 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