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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자 May 21. 2024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D&C(dilatation and curettage)

파키스탄인 유학생이 사회복지팀을 방문했다. 

병원에 오는 것이 딱히 기쁠 일도 없겠지만 말수가 적고 침울한 표정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듯 장문의 영문 편지부터 내민다.

구구절절 어려운 사정과 도움을 요청하는 글로 빼곡했다.  

종종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편지를 받아 들고 젊은 부부이기에 임신이겠거니 짐작했다. 


6개월 이상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배우자와 미성년의 자녀는 동반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다만 동반비자로 입국한 가족은 체류 기간 6개월을 채워야 건강보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유학생의 아내도 3개월 전 입국했기 때문에 아직 건강보험 자격이 없다.

보통은 이 기간 병원비에 대한 부담으로 사회복지팀을 방문하기도 한다. 


내용 중 'D&C(dilatation and curettage)'가 눈에 띈다.  

부인과 질환이나 유산 혹은 사산 시 받는 소파 수술을 말한다. 

첫 상담에 임팩트가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상담실로 안내하자 대뜸 태아 초음파 사진부터 꺼낸다. 

임신 9주 차 초음파 사진이다. 

사진에는 태아의 모습과 심장박동이 기록되는 것이 보통이다.

심장박동 기록은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에 띄지 않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계류유산인 듯하다. 

* 임신 주수 기준으로 임신 20주 전 임신이 종료되는 것을 ‘유산’이라 하고 임신 20주 후 태아가 사망하는 것을 ‘사산’이라 한다. *


슬의생(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의사가 유산을 알리자, 산모가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진료 대기 중인 산모들도 침묵하며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석형 : “아기 잘 노는지 한번 볼까요?”

석형 : “산모분 제가 여러 번 확인을 했는데 아기 심장이 안 뛰는 것 같습니다.”

산모 : “아기가 어.... 죽었다는 얘기예요, 선생님?”


유학생인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초음파 사진을 꺼내 보였지만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태아를 품고 있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임신 9주 차라 태동은 없었겠지만 수술 후 마음은 또 어떨까?


내가 짐작하거나 감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고, 경험해 보았다고 한들 다 같은 마음은 아닐 것이다. 


슬의생(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또 다른 장면이 나온다. 

산모 : “교수님은.... 이런 병 가진 산모들 워낙 많이 보시니깐.... 이 정도 병은 병도 아니죠?”

석형 : “유산이 왜 병이에요?”

석형 : “유산은 질병이 아니에요!”

석형 : “당연히 산모님도 잘못한 거 없고요.”

.

.

.

석형 :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병원은 늘 죽음이 함께 존재한다. 

누구 하나 안타깝지 않은 죽음은 없다. 

하지만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는 죽음이 특별히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무에게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슬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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