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거실 시대, 우리는 어디서 소통을 배우는가
카페에서 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한 커플이 앉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였다.
둘은 마주 앉아 있었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다.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둘이 싸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이어졌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더니,
짧게 말을 주고 받고
다시 각자의 화면으로 돌아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조금 더 들어보니
대화의 내용은 나의 예상과는 달랐다.
말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고,
서로를 향한 애정도 느껴졌다.
싸운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낯설었다.
그들의 대화는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끊겨 있었다.
콘텐츠를 중심으로 필요할 때만 연결되는 대화였다.
그날, 나는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더 관찰해봤다.
대부분의 사람들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대화를 하다가도 화면을 내려다보는 장면은
이제 너무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은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은 아닐까.
좋은 소통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많은 사람들은 소통을 기술 중심으로 생각한다.
말을 잘하는 법, 설득하는 법, 표현하는 방법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소통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통은
어떻게 말하느냐의 기술적 접근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말해왔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그 환경의 출발점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거실'이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론장 이론'에서
공론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며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광장에서 토론하지 않았다.
가정의 식탁에서,
거실에서,
그리고 카페와 살롱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타인의 생각을 듣고,
그 사이에서 입장을 정리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그 축적이
개인의 생각을 만들고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되었다.
공론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거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소통이 훈련되는
'가장 작은 공론장'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
그 작은 공론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각자의 방,
각자의 화면,
각자의 콘텐츠.
함께 있지만
대화는 분리되어 있다.
말할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소통할 환경이 사라졌다.
진정한 소통은
필요할 때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어쩌면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가
그 사람의 소통을 결정한다.
그래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말할 것인가.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 대표가 중요한 미팅에 들어갔다.
그 미팅의 결과에 따라
사업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는 중요한자리였다.
미팅이 시작되자
상대방은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무음으로 바꾼 뒤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간은 온전히 이 미팅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 순간, 미팅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의 대화는
내용보다 태도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그리고 그 작은 행동이 2시간의 미팅을 결정지었다고.
우리는 종종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결정되는 것이 있다.
얼마나 이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가.
소통은 '환경'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좋은 환경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흐름속에서
그 좋은 환경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와 마주 앉았을 때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는 것.
그 작은 행동이
'지금부터는 온전히 당신에게 집중하겠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가 될 것이다.
진정한 소통은 말의 기술이 아니라
집중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좋은 소통을 원한다면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라.
소중한 사람과 진짜 소통을 앞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와 마주하고 있다면
한 번쯤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대화에 임해보면 어떨까?
-
by 커뮤니케이션 칼럼니스트 김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