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서 나와 좁은 오피스텔에 살게 된지도 6개월이 훌쩍 넘어간다. 이전의 생활패턴에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세탁과 식사다.
이제는 빨래를 하지 않으면 입을 옷이 없어진다. 쌀이 떨어지면 밥을 해 먹지 못한다. 햇반을 돌려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갓 지은 쌀밥의 맛만큼 사람의 입맛을 매료시키는 것도 없다.
독립하기 전에 압력밥솥을 사기 위해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하이마트에도 가보고 작은 가전제품 판매장에도 들렀다. 대부분의 압력밥솥이 5~6인용이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혼자서 밥을 해먹을 때는 2~3인용 밥솥을 사서 적게 자주 해 먹는 것이 낫다고 했다. 오래되어 딱딱하고 눅눅해진 밥을 먹게 되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적당한 2~3인용 밥솥을 사지 못해서 쿠팡에서 26만 원 정도에 3인용 밥솥을 샀다. 쿠쿠 밥솥은 백미의 경우 20분, 현미의 경우 40분이면 밥이 다 된다. 밥을 다 지으면 “쿠쿠하세요~ 쿠쿠!”라는 경쾌한 소리로 알려준다. 나는 항상 이 알림음을 속으로 따라 부르며 밥을 저어놓는다.
대개 쌀 계량컵으로 2인분 정도의 밥을 지어놓으면 3끼는 먹는다. 건강을 생각해서 과식을 피하는 편이기 때문에 쌀이 생각보다 빨리 줄지는 않는다.
집 앞에 롯데 빅마켓이라는 대형 마트가 있다. 이 곳에서는 10kg짜리 쌀 밖에는 팔지 않는다. 쌀을 상온에 오래 놔두면 여름에 벌레가 끼지 않을까 걱정이다.
평일에는 밥을 지어먹고 주말에는 부모님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 일주일에 2번 정도 밥을 지으니 한 달에 8번, 6개월 동안 48번에서 50번 정도 밥을 지어봤다. 이 정도면 나도 밥 짓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계량컵과 내솥에 그어진 물 눈금만 있으면 누구나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는 게 전기밥솥의 장점이지만 말이다.
김훈의 수필 중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논한 것이 있다. 꽤 유명한 수필집의 표제작이니 굳이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훈은 이 수필에서 밥을 먹기 위해 하는 일 – 밥벌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또 인간이라는 동물이 밥을 먹는 행위에 담긴 비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요즘에는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니 밥벌이의 지겨움이 아니라 과자 벌이의 지겨움, 빵 벌이의 지겨움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먹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때문에 끊임없이 무언가 일을 해서 음식을 살 돈을 벌고, 음식을 사서 혹은 만들어서 입에 집어넣는다.
내 오피스텔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쿠쿠 밥솥도 그런 엄중한 인간의 행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밥 먹는 일에 대해 생각하면 과거에 아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예종을 졸업하고 시나리오 작가 일을 하다가 비명에 간 모씨라거나 자매와 함께 천천히 죽어간 어머니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밥이 넘쳐나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양도 무시할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이유가 어찌 되었든 먹지 못해 죽는다는 형태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나는 다 된 밥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딱히 노숙자가 아니더라도 배고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정부에서 운영하면 어떨까. 아마도 주변 식당에서 자영업자 죽이기라며 반대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밥을 먹을지 알 수 없다며 유해환경 운운하는 이웃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반대로 생각하면 이 무료 식당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한 끼의 밥을 준다는 행위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많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 두 가지 축, 타인의 밥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타인의 밥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타인의 밥을 존중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나만이 존재한다는 유아론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생각보다 실천하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서 우선은 밥부터 해결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한 명의 사람이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입을 옷과 살 집, 먹을 것, 즐길거리가 있어야 한다. 이런 타인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라는 명제가 나오기도 한다. 모든 국민에게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돈을 준다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불합리한 상황들이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다.
최근에 만들어진 당 중에는 기본소득당도 있다. 국회의원이 1명뿐인 원내 정당으로 실제 정책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다. 이들도 결국에는 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꿈처럼 너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움직임 중에 극단적인 생태주의가 있다.
이들은 곡식과 과일, 채소만 먹고 고기는 먹지 말자고 주장한다. 나는 유튜브에서 이런 사람들이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시위를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도 바야흐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타자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는 사상은 일견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면서까지 타자의 생명을 위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위선이 아닐까. 이 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명이 아닌가. 엄격하게 불살생을 추구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아사가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원점으로 돌아온다. 밥을 해 먹고 산다는 것의 엄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기본소득, 무료 급식소, 채식주의. 이런 개념들은 인간에게 밥을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스갯소리처럼 밥만 먹고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십 몇 년 전에 알았던 지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인이 되기 전에 집을 나와서 따로 살게 된 그 지인은 마음에 맞는 여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자기만 했다. 그러다가 쌀이 떨어졌다. 배가 고픈 남자는 근처 공원에 나가 배가 부를 때까지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 지인은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날이 무척 추웠다고 말했다. 그 추위 속에서 둘은 밥이 없어서 며칠을 굶었다고 했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이제는 연락을 끊어져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때 밥 먹기의 무서움이 얼마나 거대한지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쌀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한다. 그럼 햇반을 먹으면 되지? 마치 앙투아네트처럼 받아치는 게 요즘 세상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밥 먹는 일의 중요성이다. 나는 매일 밥을 먹는다. 죽지 않기 위해서. by 벨레 매거진
쿠쿠 3인용 전기압력밥솥
사진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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