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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첩(立春帖), 꼭 다시 오는 봄.

원목 입춘첩 작업일기

by 황반장

봄이 오지 않을 리 없다. 서부간선도로를 달리다 만개한 산수유나무 몇 그루를 만났다. 벌써 10년 이상 이 길을 오가며 안면이 있는 나무들인데, 내가 아는 한 이 주변에서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렇다. 그러니 봄은 왔다. 하지만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겨울은 혹시나 봄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들게 한 적도 있었다. 절대 일어 날리 없다 생각했던 일들이, 자고 일어나면 우습게 현실이 되어버린 것을 몇 번 경험한 후로는 더욱더 그랬다.


그래도 우리는 봄을 기대했다. 유록색 새싹이 묵은 나무껍질을 뚫고, 벚꽃이 찬란하게 흩날려야 비로소 봄다운 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왜 그런지 봄은 그보다는 아직 추운 2월에 시작된다. 바로 ‘입춘(立春)’ 때문이다. 24 절기 중 첫 번째 절기가 입춘인데 보통은 양력 2월 4일 전후다. 입춘이 지나면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3월이고, 봄농사를 위한 비가 내린다는 4월 말 ‘곡우(穀雨)’가 지나면 5월에 ‘입하(立夏)’로 여름이 시작되는 식이다.


봄을 알리는 입춘에는 좋을 글귀를 적어 집에 붙여두는데 이를 ‘입춘첩(立春帖)’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오랜 풍습으로 보통 한 해의 풍년과 번성을 기원하는 문구를 써서 대문, 기둥, 문짝 등에 붙여 1년을 두었다. 글귀에 특별한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보통 집안의 대소사가 잘 이루어지길 바라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안녕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지금의 '입춘대길 立春大吉 건양다경 建陽多慶'으로, 봄이 시작되니 ‘立春’, 크게 길하고 ‘大吉’, 따뜻한 볕이 들어 ‘建陽’, 복이 많다 ‘多慶’는 뜻이다. 사실 비슷한 문구인데 이렇게 마주 보게 적은 것은 글의 의미와 소망을 더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봄을 준비해야 했다. 공방의 여럿이 모여 입춘첩을 소환했고, 그저 답습되는 풍습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 의미가 담기도록 애썼다.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봄단장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을 다시 기다리며.

* 괄호 < >의 문장은 신동엽 시인의 ‘봄의 소식’에서 인용했습니다.



<작업 일지>


1.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기획을 시작했다. 오랜 풍습인 입춘첩이 바뀐 생활양식에서도 즐겨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 되었다. 그 결과, 집안 어디나 붙일 수 있도록 자석과 고리를 채택했고 크기도 줄였다. 홍황색, 소색, 비색의 우리 전통 색상 술을 달아 예쁜 장식 효과도 더했다.




2. 최종 디자인 채택에서 2025년 을사년 뱀의 해를 맞아 예쁜 아기뱀 디자인을 더해 그 의미를 한층 더 높이려고 시도했다. 몇 차례 디자인 수정과 실제 레이저 각인을 반복하며 최적의 모양을 찾아 나갔다.




3. 주 재료는 딴딴한 자작나무를 사용하고 전 과정 수작업을 통해 ‘大吉’하고 ‘多慶’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입춘첩(立春帖)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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