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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Jan 11. 2024

사명과 행복

모든 건 변한다. 

학교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반복적으로 듣는 말의 힘이 크다. 내가 젊었을 때는 요즈음처럼 개인의 행복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집안에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교육헌장을 강압적으로 외웠던 게 싫었으면서도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 해야 한다는 말에 꽂혔던 것 같다. 이런 교육과 즐겨 읽던 위인전과 친구 따라 몇 번 간 교회 설교가 혼합되어 신이 나에게 내린 특별한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뭔가를 해야 한다. 병원에서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도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모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어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했다. 좋은 가정을 이뤄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자. 그렇다고 특별한 철학이나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일정한 나이가 되어 학교에 들어가 학년이 올라가는 것처럼 결혼도 대학을 졸업하고 이어지는 생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신문방송학과 선배 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크리스천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통성기도를 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무조건 사랑하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사람이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으로 배우자의 조건을 따졌다.  


당시 남편은 방 한 칸 구할 돈도 없었지만 명문대 의대생이어서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러 형제 중 막내이고 군의관을 마치면 미국에 갈 계획이어서 시댁 식구와 부딪칠 걱정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는 모토를 가졌었지만 직업적으로 도와주는 것과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별개였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과 나는 같은 가치관을 가졌다. “가족끼리 돈거래는 하지 말자.” 그러나 부모님 용돈은 달랐다. 미국에서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레지던트 생활을 하며 일하지 않는 주말에 응급실 당직을 서서 용돈을 마련했다. 한국에 돌아오니 시누이가 어머니 유품에서 막내가 보낸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 놓으셨다고 갖고 왔다. 


남편의 형제들은 막내 동생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기대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기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명절에 모이면 늘 공부 잘하는 조카들 이야기가 오고 갔다. 비교적 부모 말을 잘 들었던 아이들도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잘 따라와 줬다. 그러나 30대 초반이 되어서 어느 TV 프로그램 제목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는지 넌지시 속내를 털어놨다. "엄마 말을 따랐던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요. 의사는 정말 이 직업이 좋아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돈을 벌려고 한다면 다른 직업을 택했을 거예요." "맞아요. 나도 박사학위 하느라 20대를 다 바쳤지만 지금 공부하기 싫어하는 대학생 달래는 보모 같아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한 길에 투자해서 다른 걸 생각하지 않지만 진작 다른 길로 가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아니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저렇게 이야기할까? 아니 지네들도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억지로 시킨 것 마냥 이야기를 와전하니 정말 어이없다. 얘네들은 뭐가 불만일까? 괘씸하고 섭섭했다. 여태까지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한 순간에 불행한 느낌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티브이에 나온 다른 집 아이들은 잘 먹이고 공부시키지 않았어도 부모에게 고마워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불평만 하는 게 한심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겠나?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도 실패할 여유도 주지 않고 늘 뒤에서 붙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꼼짝없이 엄마의 사명감에 갇혀 자신들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말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엄마 탓을 해? 아무래도 직장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은가 보다. 


60대 중반이 되고 보니 ‘사명감’을 갖고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가족끼리 오손도손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 그렇게 되려면 모든 구성원이 양보하고 관대해야 할 거다. 어느 정도는 타고난 성품도 있을 거고 나머지는 노력해야 할 거다. 남편은 나보다 관대해서 아이들이 좋아한다. 나도 그렇고 싶은데 잘 안 된다. 아이들이 섭섭한 말을 하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무자식이 상팔자” 란 말이 맞는 것 같다. 삶이란 게 사람과 부딪치며 어른이 되어가는 건데 나는 아직도 내 뜻대로 안 되면 속상하다. 정신 차리자.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내 품을 떠났다. 나도 아이들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던가? 그러니 오손도손 사는 집 부러워하지 말고 생각을 바꿔야 한다. 책을 읽다가 티브이를 보다가 인스타를 보다가 하루에 한 번 크게 웃을 수 있으면 행복한 거다. 기분 나쁘고, 화나고, 슬픈 일도 있겠지만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 행복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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