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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희 Nov 18. 2024

두 번째 독립

2회

어제 상견례 덕분에 만수는 마오타이주를 많이 마셨다. 사돈이 중국인이어서 마오타이주를 선물로 갖고 온 거다. 한 병은 집에 가져가라고 주고 한 병은 음식점에서 들었다. 사돈은 하루 전날 한국에 도착해 웨스틴 조선 서울에서 묶고 이틀 뒤 돌아가야 해서 사돈이 체류하는 호텔과 가까운 롯데호텔 38층 무궁화에서 첫 만남을 갖기로 했다. 원래는 강남 쪽 식당을 생각했으나 앤드류와 린다는 미국에서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 그곳으로 정했다. 4년 전에 딸의 시부모와 상견례를 할 때는 두 집안이 모두 서울이라 인터콘티넨털 호텔에서 만났다. 당시 앤드류가 의대에서 한창 바쁠 때라 한국에 나올 수 없어서 영숙과 만수는 그레이스만 데리고 갔는데 사돈집에서는 장래 사위의 누나 부부와 남동생까지 모두 와서 식시비는 각 집에서 먹은 걸 딸과 사위가 각자 계산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돈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때문에 식사는 만수가 냈다. 


앤드류와 린다는 미국에서 만났다. 앤드류는 듀크 대학을 나와 뉴욕 의대를 졸업할 무렵 영숙과 남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같은 스터디 그룹 동기라고 했다. 그러나 앤드류가 의대에 늦게 진학했고 린다는 고등학교를 일 년 일찍 졸업해서 앤드류보다 4살이나 어렸다. 영숙은 앤드류가 워낙 한국 문화와 한국 음식을 좋아해서 미국에서 태어나 잠시 한국에 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외국인 배우자를 만날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다닐 때도 한국 교회에 나가고 한국인 2세와 유학생이 만나는 모임에만 참석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원 입대하여 2년 군대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 MBA를 할지 의대를 갈지 고민하던 시기에 외국인 친구도 제법 많다고 말했었다. 


앤드류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 영숙이 만 5살 그레이스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자 두 살 아래 앤드류가 누나보다 더 빨리 한글과 영어 문장을 읽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한국에 처음 온 앤드류는 한국말을 제법 잘해서 1학년을 한 달 다니고 2학년에 올라가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앤드류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라는 걸 몰랐다고 했다. 반면, 그레이스는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여 아이들이 발음을 지적했다고 울먹거렸다. 영숙은 그레이스가 언어 때문에 왕따를 당할까 두려웠다. 더구나 남들은 그레이스처럼 영어를 자연스럽게 잘하려고 한 달에 몇 십만 원씩 원어민이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는데 그레이스는 오히려 영어를 잘하는 걸 숨기려 했다. 그래서 만수가 미국에 다시 돌아가 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만수는 한국에서 일하는 게 좋았다. 일단 언어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고, 환자도 많아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다만 대학병원에서 전세계약을 해준 아파트에서 5년만 거주할 수 있어서 그전에 집을 사는 게 문제였다. 만수와 영숙은 본가나 처가에 기댈 형편이 못됐지만 그럴 마음도 없었다. 마침 병원에서 가까운 신도시에 저렴하게 나온 49평 아파트가 있어서 병원에 전세금을 일 년만 더 대출해 달라고 사정하고 집을 살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영숙은 그레이스를 외국인 학교로 옮기고 3년간 시간 강사로 모은 2000만 원을 1년 치 학비로 냈다. 


만수가 미국에 있을 때 교환교수로 왔던 다른 학교 의대 교수 부인들은 영숙이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집을 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분명히 비슷한 월급을 받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돈을 모을 수 있냐고 했다. 그들은 모두 부모의 도움으로 강남에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만약 만수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했다면 집걱정은 없었을 거다. 미국에서는 의사에게 대출한도가 높아 당시 집값의 10%만 착수금으로 내면 중산층이 사는 동네에 30년 상황으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집값을 한꺼번에 다 내야 해서 첫 월급을 받을 때까지 친정에서 100만 원을 꿔다 쓴 영숙은 신도시 작은 아파트마저 1억이 넘어서 언제 집을 살 수 있을지 계산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 월급은 전부 저금하고 영숙이 과외와 전문대학교 강사로 받는 월급으로 생활을 하며 저축하다 보면 언젠가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다행히 만수는 병원에서 환자가 가장 많은 의사가 될 만큼 열심히 일하며 삼시 세끼 식사를 병원에서 해결했다. 영숙도 아이들에게만 고기반찬을 해주고 자신은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떡볶이로 점심을 때우며 전철을 몇 번 갈아타며 시간 강사 수업을 위해 수원까지 갔다.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는 교육을 철저히 시켜 그레이스와 앤드류는 고모가 찾아왔을 때도 문을 안 열어줬다고 했다. 


다른 의대 교수 부인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강남에 있는 음식점에서 외식을 한다고 했지만 영숙은 특별한 기념일 이외의 외식은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 영숙이 좋아하는 초밥을 먹고 싶을 때 일식집에 가는 것보다 아파트 상가에서 양을 많이 주는 초밥 집에서 포장해서 집에서 예쁜 접시에 담아 식탁을 차렸다. “식당에서 먹었으면 아마도 10만 원은 나왔을 걸. 아이들이 음료수도 시켜달라고 하고, 앤드류는 돈가스를 좋아하니 그것도 시켜달라고 했을 거야. 그러나 돈가스는 내가 집에서 더 깨끗한 기름에 튀겨주면 되고, 포장 초밥은 5만 5천 원밖에 안 하지만 온 가족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양이니 얼마나 좋아!” 영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상을 차리는 게 신났다. 아이들 옷도 미국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큰 것으로 사 온 걸 몇 년째 입히고 있었다. 일요일엔 교회에서 영어 성경 공부를 지도하며 교사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으로 아이들과 점심을 해결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집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던 건 아이앰애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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