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이왕이면 한국 사람이면 좋았을 걸… 영숙은 앤드류가 중국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외국인 학교 다닐 때 만났던 엄마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중국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엄마들이 거만하거나 영숙에게 무례하게 대한 적은 없었지만 경제적 차이 때문인지 영숙이 오히려 그들을 만나는 게 불편했다. 그들은 대부분 학벌도 좋았다. 한국에서 상위 1% 안에 들어야 갈 수 있는 S대 의대 치대 영문과를 나와 전업 주부보다 교수 거나 전문직을 갖은 엄마들이 많았다. 영숙은 Y대학교 간호학과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자격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그들 앞에선 주눅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보다 재산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정신과 간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정교수가 되어 은퇴를 일 년 남겨두고 있어서 그들보다 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워낙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명품백을 사고 싶으면 가격표를 보지 않고 한 개 정도는 살 수 있게 됐지만, 그런 걸 몇 개 사보니 이것저것 골라서 들고 다니는 게 귀찮았다. 한 개만 있으면 그것만 계속 들면 되는데 여러 개가 있으니 고르는 데 시간을 쓰는 게 갑자기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별 수 없구나. 이런 것에 혹하고. 이런 걸 들면 뭐가 달라지나? 나는 난데…” 그래서 더 이상 명품을 사지 않고 옷은 백화점 세일에서 사고 백은 명품으로 번갈아 들고 다녔다. 명품 백을 옷장에 진열해 놓으려면 왜 사나? 살아생전 열심히 들고 다녀야지. 그러나 청담동 고급 빌라에 살며 명품백이 새로 나올 때마다 사는 사람은 명품백을 소중히 다뤘다. 영숙처럼 지하철 문에 걸리게 하지도 않았고 비나 눈을 맞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가방은 늘 새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영숙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준 가방을 들고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유학생 부인을 만났는데, 그녀가 영숙의 가방을 보며 “어머, 그것 진짜예요? 너무 예쁘네요” “네?” “아니 그레이스 엄마가 워낙 검소해서 혹시 모조 가방을 잘 만드는 가게가 있나 해서요.” “아…” 이런 말을 듣고도 영숙은 무덤덤했다. 하긴 큰 사업을 하는 친정에서 부유하게 자란 그 사람이 보기에 영숙은 가난한 집에서 자라 간호학과에 가서 운 좋게 의사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실상 영숙은 외교관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자랐다. 한국에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을 1960년대부터 영숙은 명품백을 만드는 나라에서 살았었다. 중학교도 일본에 있는 국제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만 한국에서 다녔다. 그러나 부잣집 큰 딸이었던 영숙의 엄마와 달리 영숙은 엄마가 부와 외모에 큰 가치를 두는 게 못마땅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숙은 엄마가 골라주는 옷을 입어야 했다. 대학교도 학과도 엄마가 선택해 주는 곳으로 갔다. 영숙이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외무부를 그만뒀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이모부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 갈 때까지 무려 5년간 생활비의 반 이상을 외가에서 타다 썼다. 영숙 이모는 영숙을 간호학과에 보내라고 했다. 미국에서 잘 알고 지내는 교수 부부가 있는데 부인이 간호학 박사를 하여 한국에 있는 모교에 학장으로 가게 됐다고 했다. 영숙 아버지는 영숙이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가 되는 게 못마땅했지만 의대를 갈 수 없는 성적이고 다른 학과는 미국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이모 말을 믿고 영숙이 간호학과에 가는 걸 허락했다.
그래 중국 사람이 나을 수 있어. 더구나 고등학교를 월반할 정도로 똑똑하다면 2세도 똑똑하고 좋지 뭐. 아버지가 그러셨지. 2세를 위해 혈통을 봐야 한다고. 린다는 홍콩에서 태어나 큰 운송회사를 경영하는 회장의 외동딸로 어릴 때부터 부모와 세계의 모든 관광지를 돌아다녔고 중학교 1학년 때 부모와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 가서 사립 중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는 상해로 돌아가 한국의 아버지처럼 기러기 생활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