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인 것 같은데... 아닌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책 <<부채: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을 읽으면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인류학 못지않게 역사, 경제, 철학, 어원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런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부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놨다. 2011년 책은 큰 인기를 얻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겪은 미국은 3년 후에도 여전히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돈을 꿔서 집을 산 사람만 문제고, 돈을 꿔준 은행은 잘못이 없나? 양쪽 다 무리수를 뒀다. 그러나 그레이버의 책을 읽으면 돈을 꾼 사람보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 거다. 왜 그럴까?
그레이버는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 문명에 기록된 최초 부채 제도부터 “축시대 문명(Axial Age)인 기원전 800년~서기 600년, 중세 시대(서기 600~1450),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서기 1450~1971) 그리고 책을 쓰던 시점까지 부채 개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 책 제목처럼 5000년의 역사이다 보니 옛날이야기가 많다. 흥미로운 사건과 자료가 많아 책장은 잘 넘어간다. 중세 아일랜드의 “명예 가격(honor price)”와 고리대금을 이야기부터 왜 서양에서 “부탁해요” “고마워요”라는 말을 쓰느지, 선물 교환에 관한 긴 설명, 이기심(self-interest)이 홉스(Hobbes) 시대에 등장한 배경, 코르테스가 아즈텍인들을 잔혹하게 약탈한 사건, 16세기 중국이 유럽 식민지에서 캔 은의 90% 이상을 수입한 상황, 애덤 스미스가 중세 페르시아 경제소책자를 베꼈다는 주장, 맨해튼의 저장된 금과 911 사건의 음모설 등.
그러나 요약이 잘 안 된다. 글 쓰는 방법이 특이하다.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을 던진 다음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보도록 유도한다. 기존의 학설을 반박한다. 방대한 인용과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통설의 모순을 지적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자칫 처음 질문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괜찮다. 전에 했던 질문은 다음 장에서 형태를 바꿔 반복한다. 결국 그레이버는 인류학과 기타 학문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연구를 모아 자신의 이론을 공고히 한다.
2장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레이버는 채무와 단순한 의무(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느낌)의 차이가 “돈”이라고 했다. 고대 메스포타미아 점토판에 기록된 정확한 빚의 양이나, 빚을 돈의 관점에서 상상한 초대 도덕 철학 자료가 있는 걸 보면 부채의 역사는 화폐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류학적 도구를 적용하여 돈의 실제 역사를 재구성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전에 경제학 이야기부터 한다. 인류학에서 발견된 화폐의 기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아주 오랫동안 경제학과 경제 역사 이야기가 이어진다.
경제학자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대목이 많다. 아마도 사회 과학에서 경제학의 위상이 높고 일반인도 경제에 관심이 많아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하는 기세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은 화폐의 기원을 말할 때 흔히 물물교환이 일어나고 화폐가 생기고 신용이 가장 늦게 발전했다고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주화의 역사만 나올 뿐 신용 체계에 대한 논의는 없으니 화폐 전에 물물교환이 이뤄졌다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19세기 중반, 루이스 헨리 모건은 이로쿼이족의 주요 경제 제도는 대부분의 물품을 비축하고 여성 위원회가 배분했으며, 아무도 화살촉을 고기 조각과 교환하지 않았다고 했다. 케임브리지의 캐롤라인 험프리도 물물교환 경제의 사례는 전혀 기술된 적이 없고, 그로부터 화폐가 출현한 사례는 더더욱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물교환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물물교환은 모르는 사람이나 적과 이뤄졌다. 브라질의 남비콰라족은 100명 정도로 구성된 작은 무리로 사는데, 다른 무리에게 무역을 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면 족장은 상대방을 칭찬하고 무기를 내려놓고 군사적 대치를 흉내 낸 노래와 춤을 춘 후 각 진영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가 교역을 한다.
그레이버는 특히 경제학을 탄생시킨 애덤 스미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가 말한 물물교환에 대한 상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논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콜럼버스 이후 모험가들이 금과 은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을 때 물물교환의 땅을 발견하지 못하며 사라졌다. 즉 모든 사회에는 정부가 있었고 모든 정부는 화폐 역할 하는 걸 만들었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화폐가 정부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하며, 재산, 화폐, 시장은 정치 제도 이전에 존재했고 인간 사회의 토대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레이버는 스미스의 이런 주장 덕분에 경제학이 고유한 원리와 법칙을 지닌 학문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건 마치 경제학은 거짓된 전제에서 비롯된 학문이란 소리로 들려서, 경제학과 무관한 나도 그레이버의 글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읽는 목적이 정체된 뇌를 자극하여 알지 못했던 세계를 탐구하는 거라면, 이 책은 분명히 내게 그런 흔들림을 줬다. 사실 물물교환을 통해 돈이 발명되었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데 그런 경우가 인류학적 연구에서 전혀 발견되지 못했다는 건 놀랍다 못해 의심이 갔다. 아마도 그가 반박적으로 제시한 예가 타당한 것도 있지만 이해가 잘 안 가는 것도 있어서 그랬을 거다. 예를 들어 누에르족은 음식과 기본적인 필수품을 나누는 게 도덕의 기초지만, 부의 상징인 소는 목숨을 걸고 지키는데 그런 물건은 절대로 사고팔지 않는단다(p.98). 그럼 여기서도 부자는 계속 대물림된다는 건가?
참고문헌만 37쪽이나 되어 저자가 인용한 모든 자료를 다 찾아볼 수 없었지만 몇 가지 알고 싶은 걸 골라 구글링을 해봤다. 그중 하나가 1900년 바움이 쓴 “오즈의 마법사”와 은본위제의 관계다. 책에는 인민당원(Populists)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등장인물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단다. 동서양의 사악한 마녀는 은행가, 허수아비는 부채의 함정을 피할 수 없는 농부, 양철 나무꾼은 농민과 연대할 마음이 없는 산업 노동자, 겁쟁이 사자는 개입할 용기가 없는 정치가, 그리고 오즈는 온스의 약자니까 귀금속 등 무게의 단위라는 거다. 그럼 도로시의 신발은? 책은 영화와 달리 은색이어서 은본위제를 상징한다고 했다.
인민당원은 누구이고 은본위제는 뭐지? 19세기 후반 인민당원은 주로 농부와 노동자 계층으로 농민의 권리와 경제 개혁을 옹호했다. 그들은 “자유 은화 운동(Free Silver Movement)”을 펼쳤는데, 은 공급 증가가 경제 성장을 이루고 농부와 채무자의 빚 상환을 용이하게 할 거라고 믿었다. 특히 은행가와 산업가들의 금본위제를 지지하고 있어서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운동은 상당한 지지를 얻어 민주당은 정부가 은을 의무적으로 사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1893년 공황 때 이 법안의 폐지로 은행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19세기말 미국은 총체적 난국을 겪고 있었다. 농부는 빚으로 새 기계를 구입해서 생산을 늘렸지만 곡물 가격이 반 토막 나서 힘들고, 계속 임금이 깎인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1877년 헤이즈 대통령은 연방군으로 파업을 진압했다. 중서부 농가는 은화도 화폐로 발행할 수 있게 해 달라며 1892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인민당원의 대선 후보로 뽑았으나 은본위제는 중서부 외에 다른 지역에서 인기가 없어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철도 화사는 건설 과다로 붕괴하고, 국제무역은 관세 정책으로 줄어들고, 의무적인 은 매수로 금 인출이 늘어나자 외국 투자자는 경계하고, 사람들은 은행으로 몰려가 돈을 인출해서 1893년의 공황이 일어났다.
역설적이게도 그레이버의 싸움을 거는 듯한 글쓰기 스타일은 책에 나온 내용이 사실인지 찾아보게 만들어 독자를 공부하게 만든다. 가만히 보면 그레이버는 옛날에 한 마을에서 누가 누구인지 다 알고 살던 시절에 돈이 없어도 필요한 물건을 꾸고 나중에 추수를 하면 갚았던 시절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부채가 신용과 연결되었다면 돈은 폭력과 연관 지었다. 축시대 문명에서 군사, 주화, 노예의 복합체가 성장했고 이런 복합체는 도시를 약탈하고 인간을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노예로 일하게 한 용병 군대에 의해 강화됐다고 하니 말이다.
사실 돈이 어떻게 발명되었는지, 왜 그게 중요한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설사 물물교환이 먼저 시작되고 돈이 생겼다고 말한 애덤 스미스가 틀리고 왕이 군대를 유지하고, 세금을 걷고, 시장을 만들기 위해 돈이 생겼다는 말이 맞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빚을 지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돈을 만들어 원주민을 조정하고 건물과 길을 만들어줬으니 돈을 내라고 해서 그 빚을 아직까지 갚아야 하는 나라가 있다면 탕감하는 게 맞다. 개인이 진 빚도 사정에 따라 탕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빚이 병이나, 직장을 잃거나, 사기로 인한 거라면 채무를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집도 없고 비정규직인 사람이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돈을 모을 수 있을까? 극도의 절약으로 상당한 금액을 모은 젊은이가 티브이에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정말 칭찬할 일이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은 저렇게 하지 않아 가난한 거예요”이라고 말할 수 없을 거다. 처음부터 가난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은 모른다. 나도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상상해도 우울하다. 한쪽은 먹을 게 넘쳐서 버리는데 다른 쪽은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면 음식을 거저 주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레이버처럼 자본주의가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냥 살 집이 있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조금의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만큼 돈이 있다면 돈을 더 벌려는 욕심을 버려도 될 것 같은데… 함께 사는 세상에서 내게 이득이 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참고문헌>
Graeber, D. (2011). Debt: The First 5,000 Years. Brooklyn-London: Melville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