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더 굿 테러리스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의 소설 <<더 굿 테러리스트(The Good Terrorist)>>를 읽기 전까지 빈집에 무단으로 들어가 사는 스쿼터(Squatter)라는 사람들이 있는 줄 몰랐다. 1980년대 영국, 한 무리의 젊은이가 철거 예정인 건물 43에 산다. 주인공 앨리스는 두꺼운 벽돌집이 1910년에 지어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외관과 달리 안쪽 상태는 심각하다. 갈라진 벽, 썩은 서까래. 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안 들어온다. 변기는 시멘트로 막혀 있다. 앨리스가 오기 전까지 스쿼터들은 버킷에 소변을 보고 모아 놨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이미 5명이 살고 있다.
앨리스는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를 전공했지만 구직은 하지 않고 정부에서 주는 복지수당으로 산다. 무단 점거한 집을 수리하거나 정치 활동비가 필요할 때마다 부모나 지인에게 돈을 요구한다. 주지 않으면 도둑질을 한다. 절도의 대상은 아버지 세드릭이다. 혼자 살았으면 스쿼터가 되지 않았을까? 분명하지 않는 이유로 재스퍼에게 꽂혀서 혁명가라고 자처한다. 앨리스는 구직에 실패한 재스퍼를 엄마처럼 돌본다. 재스퍼는 그런 그녀에게 시큰둥하다.
스쿼트로 옮기기 전 앨리스는 재스퍼와 함께 엄마 도리스 집에서 살았다. 앨리스 부모는 이혼하고, 아버지는 엄마에게 가족이 살던 큰 집을 주고 재혼했다. 세드릭은 전 부인이 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탰지만 도리스도 빈방에 세를 줘서 생활비와 공과금을 충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36살 앨리스가 재스퍼를 데리고 와서 각각 한 방씩 차지하고 4년이나 눌러사는 바람에 생활비는 바닥났다. 도로시는 더 이상 무위도식하는 딸을 감당할 수 없어 원룸 아파트로 이사 간다.
도대체 앨리스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린 시절 앨리스는 사교적인 부모 밑에서 윤택하게 자랐다. 세드릭은 책을 써서 돈을 벌어 인쇄소를 인수하고 노동당 정치인과 친분을 쌓아 사업이 번창하여 큰 집으로 이사 갔다. 주말이면 파티를 열고 사람들은 앨리스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 자고 갔다. 앨리스는 남동생 험프리와 가깝지 않다. 도로시가 파티를 열면 앨리스는 음식 만드는 엄마를 돕는 게 즐거웠지만, 험프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앨리스는 도로시처럼 사람들에게 음식 해먹이는 게 좋아 대학을 졸업하고 그룹 홈에서 학생들을 돌본다. 그때 재스퍼를 만났다. 한편 대기업에 취직한 험프리는 잘 산다.
평생 정치 운동을 했던 도리스 레싱은 실제로 시위 현장에서 이 소설 속 스쿼터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났단다. 1980년대 영국의 정치적 시위는 같은 시기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아일랜드 공화군을 돕거나, 공산당을 옹호하거나, 여성 운동, 고래 구하기, 오염 방지 등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때로 연대하기도 했다. 분명 당시에 조직적인 단체도 많았을 텐데, 앨리스와 동료들은 어딘지 아둔하고 엉성하다. 특히 재스퍼와 버트는 앨리스가 훔친 돈으로 아일랜드에 가서 아일랜드 공화군에 가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소련에 갔지만 공상당원이 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 둘은 앨리스와 필립이 스쿼트를 고치느라 애쓸 때 마치 중요한 작전을 짜는 것처럼 늘 쑥떡거리지만 집안일은 모른 척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 아팠던 두 사람은 짐과 필립이다. 건물 43에 사는 운동권 사람들은 모두 중산층 출신이다. 그러나 흑인인 짐과 허약한 필립은 운동권이 아니다. 짐은 건물 43에 처음 입주했지만, 나중에 온 운동권 사람들은 그가 운동권이 아니라고 나가라고 한다. 앨리스는 동료들을 설득하고, 짐이 세드릭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한다. 짐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다. 그러나 앨리스가 아버지 회사에서 돈을 훔치는 바람에 짐이 의심을 받고 해고된다. 앨리스는 제정신인가? 세드릭 회사에서 도둑질을 하면 짐이 의심받을 수 있다는 걸 몰랐을까? 오해는 풀렸지만 짐은 사라졌다.
필립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해고되어 살 곳이 없다. 앨리스는 필립에게 건물 43의 수리를 부탁하고 공사비 대신 방을 준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막일로 부지런히 일하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일 구하기가 어렵다. 앨리스는 오랫동안 여러 집을 무단 점거하여 페인트 칠을 한 경험으로 제법 페인트 칠에 능숙하다. 필립은 은근히 앨리스가 자신을 도와 공사일을 하길 바라지만 앨리스는 거절한다. 얼마 후 필립은 공사 사고로 사망한다. 건물 43에서 앨리스만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어떻게 보면 앨리스를 포함하여 테러를 일으킨 무리들은 집에서도 반정부 단체에서도 소외된 무력한 사람들이다. 역사를 전공한 버트는 레닌의 말을 종이에 적어 앵무새처럼 읽지만 재스퍼와 대화하고 패트와 잠자리를 갖는 것 외에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재스퍼는 사기 투자로 파산한 변호사 아버지를 원망하며 “부유한 중산층에게 최대한 많은 걸 뜯어내는 게 모토”라며 앨리에게 빌붙어 산다. 공상당원 앤드류와 뮤리엘은 이런 버트와 재스퍼를 무시한다.
여성 단체 소속 패이와 로베르타도 여성 공동체에 살다 건물 43으로 이사 왔다. 자주 자살 시도를 하며 흥분하는 패이를 달랠 수 있는 사람은 로베르타뿐이다. 앨리스도 갑자기 감정조절을 한지 못하고 화를 낼 때 다른 사람 같다. 이렇게 분노에 차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아마추어 폭탄 제작자 조스린을 만난다. 그들은 뉴스에 나올 일을 벌이자고 작당한다. 설마? 폭탄 장치를 누른 패이가 죽는다. 무고한 시민 5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한다. 15살 소녀도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어떻게 “좋은 테러리스트”인가? 일말의 동정마저 싹 가시는 순간이다. 특히 앨리스의 반응이 놀랍다.
“딸이 폭탄 테러 현장에 있었다는 걸 도로시가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기분 나빠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그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었으니까. 앨리스는 어린아이처럼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을 떨었다. 이건 절대 도로시에게 말할 수 없는 일… 엄마와의 단절감이 느껴졌다… 말다툼 대신…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할걸!”(p.371).
어째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나? 캐롤라인처럼 미리 빠지지 않고 정신 나간 버트, 재스퍼, 패이, 조스린이 테러를 저지르는 걸 방조했으면서. 자신이 직접 폭탄을 만들거나 설치하지 않아서 그랬나? 아니면, 중간에 사마리탄즈(Samaritans)에 전화를 걸어 폭탄에 대해 말해서 그랬나? 거긴 그냥 위기를 느낄 때 전화를 거는 곳이지 않나! 그것도 폭파 장소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끊었다. 앨리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물 43에 따뜻한 물과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70명이 모였던 운동권 대회를 성황리에 마치게 한 걸 보면 분별력이 있는 사람 같은데, 부모에게는 철없는 어린애 같다.
“엄마가 왜 이런 작은 아파트에 살아요? 아빠에게 돈 더 달라고 해요… 엄마, 세상은 다 망할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당신은 더러운 파시스트 제국주의자예요” (p. 371). 이런 말을 듣고도 도리시는 앨리스가 언젠가 제대로 살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딸이 데리고 온 재스퍼까지 4년이나 데리고 살았다. 앨리스와 재스퍼는 현재 시세로 일주일에 각각 200달러의 복지수당을 받으면서도 도로시에게는 한 푼도 안 주고, 재스퍼는 앨리스의 돈까지 가져갔다.
도로시는 앨리스가 “혁명가 놀이”를 한다고 비난했지만, 도로시도 젊을 때 데모를 했다. 그러나 시위에서 만난 절친 조이와 20년 만에 의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시위에 가는 건 재미있서지. 소풍처럼…. 경찰에게 구타당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농담일 뿐이야. 그들은 너희를 보고 ‘잘됐군, 그 덕분에 바쁘게 지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거야" (p.339). 모든 시위를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 없겠지만, 때로 어떤 시위는 이런 면도 없지 않다. 가수가 나와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나쁠 건 없다. 다른 사람을 헤치지 않는 한 명분을 갖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거니까.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데이비드 그래이버가 <<부채, 첫 5,000년의 역사>>에서 한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 적어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p.390). 글쎄, 버트나 재스퍼처럼 부지런하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 해를 끼친 것 같은데… 뭐, 부지런한 엘리스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를 줬지만. 암튼 양쪽 다 아주 소수일 거다. 근면함이나 부의 유무를 떠나 인구의 일정 비율은 병적으로 악하니까.
그렇다면 앨리스, 재스퍼 등 폭탄 테러에 가담한 사람이 모두 악한인가? 애매하다. 작전을 모의할 때 앨리스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으니 야밤에 하자고 하자,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버트는 ”도덕은 혁명의 필요에 따라 굴복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인명 피해를 무시했고, 패이는 “죽어도 싸다”라고 했고, 조스린은 “이렇게 하면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하고… 뉴스에도 나올 거”라고 했다. 앨리스는 그룹에서 소외되는 게 싫어 동조했다.
이들은 분명 악의 길로 들어섰다. 일단 사람이 죽었는데 크게 동요하지 않고 도망갔다. 도덕적 타락이다. 앨리스의 변화도 심상치 않다. 처음에는 사람들 피해를 걱정했는데 막상 뉴스에서 사상자 소식을 듣고 티브이에 나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서서히 진짜 테러리스트가 되어가는 것 같다. 어느 세대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다. 부패한 정치와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 사람을 해치는 혁명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Lessing, Doris. The Good Terrorist (Vintage International).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Kindle Edition.
Graeber, David. Debt: The First 5,000 Years, Updated and Expanded. Melville House. Kindle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