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롭고
전철역에서 하차태그를 찍고 나오는데 맞은편에서 승차태그를 하려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씨발!” 내게 한 건가? 왼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오른손으로 교통카드를 찍느라 경황이 없었다. 피곤하고, 장바구니도 무겁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평소 듣지 못한 욕이 의식까지 다다르는데 시간이 걸렸다. 긴 에스컬레이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귓전에 맴돌던 욕이 편도체에 전달됐다. 가슴이 떨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친놈! 어디서 욕을 하고 난리야!” 이렇게 구시렁거렸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급기야 청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라고 중얼중얼 저주를 퍼부었다. 내가 미쳤나?
분노는 바이러스 같다. 청년의 화가 전염된 것 같다. 진정하자.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사람과 실랑이를 해서 무슨 이득이 있나? 오히려 기분만 더 상했을 거다. 침묵한 건 잘한 거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해도 화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만만하게 보여서 그랬을 거야. 내가 건장한 남자여도 그랬을까? 비열한 놈. 저렇게 천박한 인간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너는 더러운 똥이야.” 그만 생각하자. 깊게 숨을 마시고 천천히 내쉰다.
잠깐, 비열이 영어로 뭐였더라? Obnoxious, disgusting, nasty, abominable, repugnant, odious, abhorrent, repulsive… 엉뚱한 생각 덕분에 화가 잦아들었다. 그나저나 난 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평정을 찾고 난 후 지나치게 분노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어릴 때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욕을 하며 싸우는 모습에 진저리를 쳤었다. 자주 불똥이 내게 튀어 어두운 과거가 됐다. 절대로 욕을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꼭꼭 숨겨둔 기억이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세기 만에 어이없게 열려버렸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욕하는 사람이 무섭다. 그들은 욕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모를 거다.
에이 씨발!
또, 욕을 들렸다. 이번에는 내게 한 게 아니라 붐비는 전철에서 내리는 사람에게 떠밀려 나온 젊은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녀는 그 말을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했다. 내리는 사람들은 여행가방을 끌고 가는 외국인이었다. 직접 들었을 때보다 덜했지만 여전히 불쾌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선하게 생긴 20대 여성의 입에서 그런 험한 말이 술술 나오는 게 신기했다. 저렇게 욕을 하면 시원할까?
화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어서 무조건 참는 건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화를 내는 건 나쁜 습관으로 굳혀질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분노를 폭발하는 게 상황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화를 내면 더 화가 나서 분노와 공격성이 증폭될 뿐이다. 욕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화가 났다고 욕부터 나오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욕의 수위가 높아지고 언젠가 신체적 공격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뭐, 욕하는 사람이 전부 공격적이란 건 아니지만, 듣는 사람에겐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니 분노를 유발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요인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긍정적인 전략을 세우면 어떨까? 예를 들어 욕하고 싶을 만큼 화가 나면, 영어로 화를 표현하는 단어를 중얼거려 보는 거다. Enraged, outraged, furious, infuriated, indignant, exasperated, irate, irascible… 아무튼 함부로 욕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