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고 생각하라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by 명희

왜 우리는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고, 부자가 되고 싶고, 자녀가 의사나 전문직을 갖길 원하고, 힘든 일은 하대하면서도 장인이나 노동자가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뭉클할까?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읽으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앞서 물은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의도대로 끊임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I propose…to think what we are doing.” P.5) 아렌트는 진정한 자유는 생각이 다른 다양한 사람과 토론하며, 사회가 부과하는 가치에 잠식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오늘날 우리는 먹고살기 바빠서, 사람 보다 인공지능하고 소통하고 있으니, 잘 살고 있는 걸까?


1957년 스푸트니크((Sputnik)가 발사되었을 때 아렌트는 경이로움보다 “인간이 지구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로 봤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지구의 자연을 벗어나 우주선을 타고 인공 세계에서 사는 것 – 뭐, 이런 걸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핵폭탄의 위력을 경험한 인간은 지구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냉동 정자와 난자로 사람을 만들어 100년 넘게 살게 될까? 예상하겠지만, 아렌트는 이런 발전을 꼭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간의 호기심이나 지식의 욕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철학부터 과학 수학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의 사전지식이 있어야 그녀의 말을 더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이해가 되는 부분만 짜 맞춰 읽어도 그녀의 예지력이 놀랍고, 왠지 우울한 미래가 상상된다. 인간이 만든 물건 덕분에 수명도 길어지고 생활도 편해졌지만 그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사람 사이에서 생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시스템 속에 갇혀서 기계에 의존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그럼 그때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 살까?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까? 1958년에 출판했지만 마치 오늘날 우리의 문제를 예견한듯한 통찰력이다.


그렇다. 아렌트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사고로 평범한 사람도 생각하고 싶게 만든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고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있을까? 감탄하며 읽었지만 굼뜬 이해력 덕분에 처음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아렌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었다. 바드 칼리지(Bard College)의 한나 아렌트 센터에서 유튜브에 올린 강연도 듣고, 나카마사 마사키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도 읽어봤다. 여전히 어렵지만 일단 세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 첫째,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e)은 어떻게 다른가? 둘째, 노동(labor)과 작업(work)은 무슨 차이가 있나? 셋째, 왜 행동(action)이 중요한가?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 노동(labor), 작업(work), 행동(action)이라는 “세 가지 기본적인 인간 활동”(p. 7)이라고 했다. 즉, 이 세 가지 조건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상태 혹은 본질이다. 이중 정치적 활동인 행동(action)이 가장 상위의 행위이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 가장 하위의 활동이다. 그에 비해,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e)은 최고의 선 혹은 진리를 사색하는 삶으로 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활동적 삶(vita activa) 보다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e)이 좋은 삶(good life)이라고 했지만,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판단이 바뀌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추측을 갈릴레오가 입증하며 그동안 믿었던 상식을 의심하고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 “마르크스는 ‘물질’의 운동,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우위에 두며 정신이나 관념을 우위에 두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에 반발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p. 65). 그러나 아렌트는 현대 사회가 관조적 삶을 등한시하는 걸 우려하면서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이 다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 아렌트는 왜 굳이 노동과 작업을 분리했을까? 어떤 일을 하든 일하는 건 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현대인이 모든 일을 밥 먹기 위한 직업으로 생각해서, 작업도 노동이 됐다는 거다. 일단 노동은 인간이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육체적 활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소비적이고 소모적이고 반복적이다. 예를 들어, 농사를 통해 생산된 식량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품이지만 소비되어 남지 않는다. 다시 식량을 얻으려면 봄에 또 노동을 해야 하고, 이 일은 반복된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처럼 일에 붙잡혀 있는 인간 삶의 조건에 내재되어 있다. (“To labor meant to be enslaved by necessity, and this enslavement was inherent in the conditions of human life.” p. 83) 아렌트는 오늘날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만 하고 있다고 봤다. 철학자도 일용직도 소비를 위해 기술을 판다. 노동을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가치도 비슷하고 개성도 없고 반정치적이다.


반면, 손으로 하는 작업(work)은 몸으로 하는 노동(labor)과 다르다. 작업은 “인공적인(artificial)” 세계를 만든다. 인간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노동의 고통을 덜고, 영속적이고 안정된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거다. 따라서 작업을 통해 창조된 물건은 지속성이 있다. 예를 들어 도구가가 만들어지면 도구로 노동을 편하게 할 수 있고, 도구를 만든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도구는 계속 남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세월이 지나 도구가 낡고 없어질 수 있겠지만, 식량처럼 소비되어 없어지는 게 아니다.


특히 예술 활동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만드는 사람)가 지속성에 기여하는 유일한 활동이다. 예술은 생각을 구체화(reification)하는 작업이다. 예술의 원천은 인식이나 지성이나 합리성이 아닌 생각이다. 예술은 도구처럼 실용적인 물건은 아니어도 작가는 그림이나 음악, 글을 통해 사적인 통찰력을 대중에게 전달하며 의미 있는 삶을 공유할 수 있다. 그중 언어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세속적이지 않는 예술로, 시의 내구성은 인류의 기억 속에 얼마나 영구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생각이 구체화된 예술 작품은 필멸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불멸의 실체로써 집처럼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작업은 모든 도구가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대만 초점이 맞춰져서 제조를 위한 제조의 연속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기계의 경우 첫 단계는 자연을 모방하여 자연의 힘을 사용한 증기 기관이었다. 그다음은 전기를 이용하여 인간 세계와 자연이 뚜렷하게 분리됐다. 인간은 창조하기 시작했고, 제조는 조립 라인의 프로세스인 연속적인 단계가 됐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자동화 단계는 인간의 두뇌를 해방시켰다. 기계가 알아서 디자인하고 보완 기능을 만드는 시대라 관연 이런 기계가 인간에게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할지 의문이다. 따라서, “... 기술은 더 이상 "의식적인 인간 노력의 산물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인류의 생물학적 발전으로 여겨진다”라고 했다. (“... technology no longer appears “as the product of a conscious human effort… but rather like a biological development of mankind.” P.153)


과학과 기술 발전은 좋은 것 아닌가? 생활이 편해져서 가사노동에 쏟는 시간이 줄어 책도 읽을 수 읽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이렇게 글도 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굳이 없어도 될 물건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또, 한번 만든 물건을 계속 쓸 수 없거나 새로운 모델이 나와서 소비하게 되고, 물건의 수명이 점점 더 짧아져서 쓰레기가 쌓이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 주입한다. 물건을 사야 경제가 살고, 경제가 살아야 시민도 살 수 있다고. 그래서 나라에서 돈까지 주며 소비하라고 권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가치도 목표도 하나가 됐다. 모두 부자 되는 것. 그래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편안한 것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지도를 보고 가는 길을 기억해서 운전했는데 이제는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배우지 않아도 기억하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기술의 발달은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두뇌의 부담도 덜어줬다. 그래서 미디어에서 좋다고 하는 걸 그냥 따라 하며 산다.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는데 따라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우리가 마치 동물원의 동물 같다는 생각도 든다. 편안하게 먹이를 받아먹으며 본성을 잃은. 그래서 누군가 먹이를 주지 않으면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인 삶(vita active) 중에서 행동(action)을 가장 우위에 놓은 것 같다.


행동은 자신과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의미 있게 참여하는 거다. 따라서 행동은 강력한 의미의 민주주의, 즉 자신과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과 행동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행동은 누가 시키거나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개인이 주도적으로 시작하는 활동이다. 그런 행동의 시작은 말이다. 사람은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인간 세계에 적극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어떤 사람이 “누구(who)”라는 것은, 그가 만나는 사람에게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숨겨져 있다. 아렌트는 이렇게 공적 장소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행동(action)은 위험하다. 행동하는 사람은 행동의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한 번 내뱉은 말이나 행동을 되돌릴 수 없고, 결과도 예측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를 보라. 그는 자유시민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폴리스에서 행동(action)을 했으나 처형당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치를 인식의 문제로 생각하고 “지혜”로 해결하는 철학자-왕을 제안했지만 아렌트는 아무리 시민에게 인자한 왕이라도 왕이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시민을 공적 영역에서 추방한 폭정이라고 했다. 현대의 관료주의도 시민의 행동 대신 장인정신의 모델에 따라 전문가 정부가 정치를 만든다. 시민의 투표를 격려하지만 정치는 전문인에게 맡기라고 한다. 전문가가 지시를 내리면 시민은 따른다. 궁극적으로 정치는 수단과 목적으로 축소되어 안보, 안정, 부 등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주력한다. 문제는 통치를 수단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기술적 능력으로 간주하면 모든 수단이 가능하다는 거다. 그러면 수단을 제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권모술수. 수단을 제한할 수 없는 경우는 무서운 상황이다. 나치 독일이 그러지 않았나? 유대인을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했던 지도자는 히틀러였지만 그를 그 자리에 있게 한 건 독일 국민이다. 독일이 다시 위대한 나라가 되어 독일인이 잘 살게 될 거라는 말에 현혹되어 유대인의 희생을 눈감았던 독일인.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누군가 잘 살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는 거다. 우리 부모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동식물의 희생 덕분에 인간이 생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유대인 혐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냈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감지했을 거다. 그러나 침묵했다.


그래서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 중에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정치활동이 밥 먹고 사는 일이나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 것 같다. 그렇다고 일하고 개발하는 일이 덜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정치활동은 작업자의 손을 빌려 기록되고, 책을 만들고 배달하는 사람 덕분에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을 토론하고 교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모두 부자가 되는 일, 내 가족이 잘 되는 일에만 집중하여 과거 인간이 저지른 폭력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사는 세계에서 한 나라, 한 집단의 이익만 챙기는 목소리가 강하다면 아무리 그 의도가 좋아도 잠재적 폭력을 의심해야 한다.


<참고 자료>

Arendt, H. (2018). The Human Condition (2nd e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나카마사 마사키 (2004).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김경원 역).

https://www.youtube.com/watch?v=KqfuMM-6yAk (이것을 시작으로 총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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