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에서 두 번 만난 사람을 밖에서 보기로 했다. 이코노미스트라는 신문을 읽고 기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다. 첫 미팅은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까지 4명이 모였는데 그중에 외국인이 한 명 있었다. 눈이 크고 안경을 낀 선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줌에 올린 N으로 시작하는 이름은 러시아인처럼 길었다. 진행자도 그렇게 느꼈는지 러시아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미국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어서 러시아에서 3년간 영어를 가르쳤단다. 한국에서도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N은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푸틴과 러시아인에 대해 말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건 놀랍지 않아요. 푸틴은 과거에 러시아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나라였는지 늘 강조했죠. 그리고 러시아인도 푸틴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경제가 안 좋아 여론이 좋지 않아요. 우크라이나를 점령한다면 경제적으로도 이득일 거예요. 우크라이나가 큰 농산물 시장이니까요. 제 생각에 러시아인은 전쟁을 찬성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뉘어 있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인데 러시아가 방송에서는 전쟁 보도를 하지 않아 전쟁이 났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는 그녀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 좋아하겠다고 칭찬하자 고맙다고 답변했다.
두 번째 모임은 이중국적에 관한 거였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 때 중국 선수로 출전한 두 중국계 미국인에 대한 보도를 언급하며 국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N을 포함해 4명이 모였다. 이번에는 프랑스와 알제리 이중 국적을 가진 프랑스인이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h)에서 참여했다. 백인은 아니지만 피부가 비교적 하얀 여성은 히잡을 쓰고 있었다. 36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교육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진행자는 그녀에게 프랑스에서 알제리인으로 사는 게 어떤지 물었다.
“스트라스부르에는 저 같은 알제리인이 많이 살아서 특별히 차별받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부모님은 조부모를 따라 어릴 때 프랑스로 오셨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 혼자 저를 키우셨는데 매년 친척을 만나러 알제리에 가곤 해요. 저는 알제리 음식도 좋아하고 무슬림이지만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도 미국처럼 다민족 국가죠. 제 생각엔 힘 있는 나라의 시민인 게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국적은 알제리 국적보다 힘이 있어요. 그래서 프랑스에서 공부하거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죠."
나도 남편이 미국에서 특정 전문 분야를 공부할 때 시민권을 요구해서 함께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미국 시민권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미국에서 오래 일해서 연금 문제도 있고 아들과 친정 식구가 미국에 살아서 미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4월이면 미국에 세금 보고하는 게 귀찮지만 한국에서 일한 부분은 한국 정부에만 세금을 내면 되기 때문에 일 년 수입이 수십 억이 되지 않는 이상 세금을 더 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진행자는 N에게도 이중국적에 대해 물었다. 내 느낌엔 진행자가 여전히 N을 러시아 이민 2세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N은 자신은 이중국적을 가져본 일이 없고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나라 국적을 가져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자기 가족과 남자 친구 가족 친한 친구들이 모두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살고 있어서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미국 여권이 권위를 갖고 있어서 세계 여행을 할 때 편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국 여권이 미국 여권보다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가 더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사실 이중국적에 관한 문제는 세금을 내는 실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연관된 민감한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걸 굳이 건들지 않았다.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마치 내 부모를 버리고 다른 부모를 선택하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 부모가 아무리 못나기로서니 어떻게 부모를 버리고 다른 부모를 선택하는가? 그런데 나는 나라는 부모가 아니라 동네를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의 한 시민으로 어디에 살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선택한 나라의 법을 따른다. 그러나 내가 나고 자라고 경험한 모든 장소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다. 그래서 내겐 한국도 미국도 소중하다. 그래서 에이린 구가 “나는 중국에 있을 땐 중국인이고, 미국에 머물 땐 미국인”이라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두 번째 모임이 끝나고 N이 밋업 웹 사이트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코로나가 완만해지면 차 한잔 하자고 했다. 미국인이니 내 나이가 많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살짝 걱정이 됐다. 줌에서 만난 사람을 밖에서 만나도 될까? 남편은 러시아 스파이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놀렸다. 도대체 내 걱정의 근거는 뭘까? 우습지만 러시아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다. 레닌 스탈린 등 많은 사람을 숙청한 나라. 공산당. 뭐 이런 거다. 프랑스어를 한다고 했으면 전혀 거리끼지 않았을 텐데 러시아어를 한다는 게 낯설었다. 그러나 그녀의 메시지를 다시 읽으니 그녀는 그저 한국에서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다. 사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N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미국인이다.
프랑스어가 끝나고 회현역 1번 출구에서 N을 기다렸다. 수업이 일찍 끝나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오전에 쓰지 못한 프랑스어 일기를 썼다. 교실에서 배운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골똘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옆을 돌아보니 N이 서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줌 화면에서는 크게 보였는데 나보다 작았다. 우리는 N이 인터넷에서 찾은 빵집으로 함께 향했다. 프랑스 학원에 4년째 다니고 있으면서 신세계 백화점 외에 주위에 있는 가게를 알지 못한다. N은 네이버 지도를 보며 빵집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늘 지나치는 골목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곳이다. 그곳에 먹음직한 프랑스 빵이 잔뜩 있는 제과점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밥값을 지불하는 거라고 내가 계산했다. 그녀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다음에는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커피와 크루아상 시켜서 먹으며 2시간 넘게 떠들었다. 아마도 내가 1시간 반 이상 떠들고 그녀가 30분 정도 말했을 거다. 한국 영어 교육에서부터 손자 이야기 까기. 그녀는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러시아를 전공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 때 교환학생으로 러시아에 가서 일 년 공부했고 졸업하고도 러시아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한국에 온 이유는 남자 친구 때문이라고 했다. 남자 친구가 미군인데 한국으로 발령받아 한국에 따라왔단다. 손자 사진을 보여주자 남자 친구의 조카 사진을 보여줬다. 동양인이었다. 남자 친구 가족과 자주 만나고 모두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집에 오는 전철에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에게 궁금했던 걸 묻지 않았다. 그녀가 왜 러시아어처럼 긴 이름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남자 친구 조상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사실 그걸 묻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물어도 될까? 아무튼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