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를 읽고 든 생각
도스토옙스키(Dostoyevsky)의 <<백치(The Idiot)>>를 영어로 해석한 책 중에 펭귄 클래식스에서 출판한 책을 읽었다. 718쪽에 달하는 책을 덮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역시 나스타샤와 아글래야가 만났던 장면이다. 두 여인이 만나고 아글래야가 떠나고 나스타샤는 무너진다. 미쉬킨은 차마 나스타샤를 두고 떠날 수 없다. "내 거야! 내 거야! 그 잘난 아가씨는 떠났나요? 하하하! 그 젊은 여자를 위해 그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왜? 도대체 왜? 내가 미쳤어요. 미쳤어요... 저리 가세요, 로고진!"
지난 한 달 동안 이 책에 푹 빠졌다. 유튜브에도 녹음된 책이 있어서 듣다가 읽다가를 반복하며 어떤 부분은 3번 이상 읽고 들었다.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옙스키(Dostoyevsky)의 팬이 될 것 같다. 부인의 속옷을 팔고 아이들이 굶을 지경이 되도록 오랫동안 놀음에 빠져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시간이 났을까? 중학교 때 읽었던 "죄와 벌"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고, 작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을 때만 해도 종교에 관한 긴 설명, 등장인물의 상황, 심리 설명, 부차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 거기에 딸린 또 다른 이야기가 너무 길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백치>>는 달랐다.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다. 주요 인물뿐만 아니라 곁다리 인물까지 모두 개성 있고 해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어쩌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여기 나온 인물을 읽다 보면 카라마조프에 나왔던 사람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나스타샤는 그루셍카(Grushenka)를 연상케 했고, 미쉬킨은 알리오샤(Alyosha)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보다 이번 이야기에 더 끌린 것 같다. 주인공도 특이하다. 미쉬킨은 분명 두 여인(나스타샤와 아글래야)에게 양다리를 걸친 나쁜 남잔데 작가는 그가 남다른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있어서 누구나 그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받는 느낌이 드는 예수와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미쉬킨은 나스타샤를 만나기도 전에 초상화만 보고도 그녀의 얼굴에 고통이 크다는 걸 감지했다. 그러나 나스타샤를 좋아했던 건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녀가 평범하게 생겼어도 결혼하자고 했을까? 두 여인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외모다.
두 여인은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따르는 남성이 많았다. 게다가 둘 다 책도 많이 읽고 영리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상반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스타샤는 중산층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토트스키의 후원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토트스키 밖에 몰랐던 나스타샤는 30살이나 많은 그를 좋아해서 16살이 되었을 때 4년간 동거했다. 요새 기준으론 그루밍(grooming)에 의한 성폭력이다. 그런데 토트스키는 나스타샤를 버리고 아글래야의 큰 언니 알렉산드라와 결혼하려 한자 나스타샤는 꼭지가 돌았다. 기가 막힌 건 예판친 장군은 55세인 토트스키가 25살밖에 안 된 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겠다는데 대환영이다. 오히려 토트스키에게 집착하는 나스타샤를 떼어놓기 위해 자기 비선인 간야에게 나스타샤와 결혼하라고 했다. 간야는 아글래야를 좋아했지만 큰돈을 준다고 하자 예판친 장군의 제의를 따랐다. 그러나 나스타샤는 간야 앞에서 그가 받기로 한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불에 던졌다. 모든 사람이 탐욕스러워서 가장 비천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돈을 혐오한다고 했다.
한편 아글래야는 예판친 장군과 귀족 출신인 어머니 리자베타 그리고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세 자매의 막내다. 언니들은 늘 가장 예쁜 막내 동생이 제일 시집을 잘 갈 거라고 믿고 바랬다. 그러나 아글래야는 좀 독특했다. 간야의 여동생 바리야는 어릴 때부터 아글래야와 자주 왕래했는데 간야가 아글래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아글래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아글래야를 몰라. 걔는 모든 걸 가진 약혼자는 거절할 거야. 오히려 다락방에 사는 학생과 도망가서 굶어 죽는 걸 택할걸. 만약 오빠가 자기 환경에 자부심을 갖고 단호하게 견뎠다면 걔가 무척 관심을 가졌을 거야. 왜 미쉬킨이 걔 마음을 사로잡은 줄 알아? 우선 걔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모두 미쉬킨을 '바보'라고 했기 때문이지. 아글래야는 자기 가족을 화나게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좋았을 거야."
바리아가 정확히 봤다. 아글래야는 가족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미쉬킨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정확히 어떻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건가요?" "재산은 얼마나 되나요?" "공무원이 될 건가요?"라는 질문을 쏟아 내고 청혼한 게 농담이었다고 깔깔 웃었다. 그러나 부모는 막내딸이 미쉬킨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걸 눈치채고 딸의 짝으로 이상적인 상대란 생각은 안 들지만 "그녀의 운명이라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떤가? 한국 드라마만큼 재미있으면서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문화적 자료가 듬뿍 담긴 책이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된 걸 읽는다면 흥미롭게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고 당시 러시아 문화도 접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히 느낀 점은 미쉬킨이 남자 친구나 배우자로 좋지 않다는 거다. 그는 순수하고 바르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곤란한 상황에 놓인 모든 이에게 동등한 사랑을 주기 때문에 나만 사랑해 주는 이성을 원한다면 적절한 상대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미쉬킨 같은 남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전 여자 친구가 미쳐서 죽을 수 있으니 그녀와 함께 있어야겠다고 하다면, "그렇게 하세요. 저는 집에서 기다릴게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쉬킨은 누구와도 결혼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베라 레비데브가 프린스에게 더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 감으로는 바리아의 신랑 피트신이나 예브제니 파브로비치 란돔스키가 낫다.
미쉬킨이 도스토옙스키였을까?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 결혼했고 몇 명의 여성 친구가 있었단다. 첫 번째 부인 마리아는 아들이 한 명 있는 과부였다. 그녀와 1857년 결혼했는데 성격이 이상해서 행복하지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불행할수록 서로에게 더 집착했단다. 마리아가 아글래야 같은 성격이었을까? 그런 말은 없다. 1863년 도스토옙스키는 파리에서 연인 폴리나를 만났고 1년 후에 부인 마리아가 죽는다. 폴리나가 나스타샤였을까? 그랬단다. 처음에는 그녀가 도스토옙스키 강의를 듣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만하고 질투가 심하고 도스토옙스키에게 폐병에 걸린 마리아와 이혼하라고 종용했다. 그런데 마리아가 사망하고 청혼하자 거절했다. 뭔가 이 여자?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작품에 그녀를 등장시켰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1867년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안냐 스니트키나. 그녀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무려 25살이나 어리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진심으로 좋아하며"도박꾼"을 속기해 주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 도스토옙스키는 59세에 생을 마감하며 "안냐, 나는 당신을 항상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며 마음으로도 결코 당신에게 불충실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라오."라고 했단다.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안냐는 남편이 소설을 정해진 시간에 출판사에 보낼 수 있도록 속기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소설 판매를 관리하며 만성 놀음꾼이었던 남편의 빚을 청산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년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건 부인 덕도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