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2

주변 인물 이야기

by 명희
이 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한 내용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 경우 펭귄 클래식에서 영어로 해석된 책을 필자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뭘까? 세상을 알고 다른 사람을 알고 나를 알고 싶은 게 아닐까? 내가 저런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시간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사람을 다 만날 수 없으니 책을 읽는다. 한 번 여행을 하면 계속 돌아다니고 싶듯이 책도 그렇다.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소위 세계 명작이라고 하는 책이 과연 그런지 스스로 판단하고 싶은 허세와 자기 만족도 있다. 그래서 책은 요약된 내용이 아니라 전체를 다 읽어야 한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요약한 내용을 들어보고 다시 읽어도 좋다. 요새는 책을 읽지 않아도 구글이나 유튜브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사상을 잘 집어주는 콘텐츠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에 의해 걸러진 내용만 보고 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이 주는 에너지를 받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백치>를 읽으며 에너지를 듬뿍 받았다. 그래서 "백치 1"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 이어 이번 글을 써야만 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이 책은 주요 인물들의 드라마틱한 "사랑과 전쟁"뿐만 아니라 곁다리 인물과 내레이터의 입담에서 작가의 철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미쉬킨, 사망 선고를 받은 이폴리트, 만성적인 거짓말쟁이 이볼진 장군이 들려주는 긴 이야기 그리고 내레이터의 설명이 때로는 어처구니없고 때로는 의미심장하다. 여기에 다 쓸 수 없지만 몇 가지 인상 깊은 것만 집어보겠다.


프린스 미쉬킨이 첫 입맞춤을 했다는 마리.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그녀를 핍박했던 모든 사람에게 화가 났다. 어찌 생모가 마리에게 그랬을까? 딸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납치되어 버려졌는데... 여자가 추행을 당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피해자가 늘 죄인인 것 같다. 목사도 선생도 앞장서서 마리를 죄인 취급하니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마리에게 어떻게 했나? 그래도 마리는 폐병에 걸린 몸으로 계속 일을 했다. 프린스는 그런 마리가 불쌍해서 자기가 갖고 있던 다이아몬드 핀을 팔아 그 돈을 마리에게 모두 주며 그녀가 단지 운이 없었고 전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해주며 키스를 한다. 마리는 이 일로 더 핍박을 받는다. 그러나 프린스가 아이들에게 마리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모든 걸 솔직하게 계속 말하자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아이들이 마리에게 미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리에게 인사도 하고 음식도 가져다줬다. 마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은 마리를 사랑하게 됐다. 아이들이 모두 프린스를 따르자 어른들은 프린스가 아이들 생각을 오염시킨다고 경계했다. 그러나 아이들 덕분에 마을의 나이 든 여인들이 거의 죽어가는 마리를 돌보게 됐다. 마리가 죽은 후 아이들은 마리 무덤에 매년 장미꽃을 심었다. 목사와 선생은 프린스가 아이들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싫어했다. 프린스가 어른처럼 생각하지 않고 아이 같다고 비난했다.


내게도 프린스 같은 어른이 있었나? 그런 기억은 없지만 동화책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컸다. 한 학년에 3반 밖에 없는 작은 사립학교에 다녔다. 거기에 엄마가 가수라고 놀아주지 않던 아이가 있었다. 왜 그때는 가수를 "딴따라"라고 비아냥 거렸을까? 아빠가 없는 것도 놀림거리였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무엇을 알았을까? 결국 부모가 하는 말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말했을 거다. 얼굴이 하얗고 말이 없던 소녀는 늘 혼자였다. 내가 그 아이에게 고무줄을 같이 하자고 했더니 다른 아이들이 걔랑 놀지 말라고 했다. 왜? 지네들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인가? 나는 그 아이와 놀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 전학 갔다. 그러나 나도 부모나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을 하대했던 적도 있다. 집에서 일하는 언니가 얼마나 힘들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이등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도 대우하라는 기본 윤리만 지켜도 세상은 참 좋아질 텐데...


이 책에 나온 주변 인물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이폴리트(Ippolit)다. 아무리 옛날에 평균 수명이 짧아서 일찍 철이 든다고 해도 18살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래서 그는 늘 삐딱선이다. 프린스 생일 파티에 와서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양 자기 경험과 생각을 쓴 두서없는 긴 글을 낭독한다. "마지막 확신"이 뭔지도 확실히 말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생명을 너무 낭비하는데 익숙하고, 너무 게으르고 무모하게 대해서 생명을 가질 가치가 없다... 중요한 건 생명이다. 단지 생명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는 두 챕터나 계속된다. 생각은 많지만 아직 여물지 않는 과일처럼 떱떠름하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허영심도 있고 젊은 나이에 죽게 되어 분한 마음 두려운 마음이 뒤엉켰다. 병 때문에 잘 돌아다니지도 못하니 다른 사람 소문에 관심이 많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래서 괴팍한 이폴리트가 가엾다. 그러나 그는 나 같은 독자는 싫어할 거다. 자기에게 동정심을 보이는 건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행위라고 싫어했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마음의 문을 닫고 헌신적인 친구 콜리아에게도 짜증을 낸다. 콜리아가 프린스 흉내를 내며 온순하게 자기 짜증을 받아주는 게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고 했다.


이폴리트의 말을 들으며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고 내게 올 죽음도 생각해봤다. 작년에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57세. 5년간 암투병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 6개월 정도 남겨두고 죽음에 대해 말했으나 삶을 붙들라고만 말했었다. 그것이 동생을 위한 말인지 나를 위한 말인지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 있는 동생 묘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이번 여름에 갈 수 있을까? 좋은 죽음이란 게 있을까? 이폴리트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고 프린스는 "우리를 지나가세요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용서하세요"라고 말한다. 나도 동생에게 용서를 구한다. 내가 아직 행복하게 살아 있어서.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가 극히 평범하고 남과 똑같은데 나 스스로 독특하다고 상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 파트 4의 첫 번째 챕터에 내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뻥 터졌다. 바리야, 간야, 피트신 같은 사람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완전히 평범한 사람이란다. 돈도 웬만큼 있고 좋은 집안 출신이고 잘 생겼고 교육도 받았고 품성이 좋지만 아무런 재능이 없고 특별한 자질이나 엉뚱하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독창적인 생각이 전혀 없는 그냥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 이런 사람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고 다른 부류는 더 똑똑한 사람이란다. 첫 번째 부류는 남에게 들은 내용이나 책에서 조금 읽은 내용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으며 대중 계몽의 선구자라고 느낀다. 그래서 스스로 남다르고 독창적이라고 상상하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두 번째 부류는 간야 같은 사람인데 그들은 스스로 천재적이라고 상상하지만 독창적이라는 걸 의심하기 때문에 허영심에 이끌려 일을 꾸미다 불행하게 된다고 했다. 평생 가족을 돌보고 일한 것에 보람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시간에 화약이나 미대륙을 발견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 확실히 찾아내지 못하고 늘 발견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평범한 사람 중에 나도 끼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나는 첫 번째 부류여서 행복하다.


유튜브에 보니 도스토옙스키는 스스로 이 책을 잘 쓴 책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좋은 책이란 독자가 무언가를 깨닫고 상상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영감이 떠 오른 책이다. 적어도 내게 백치는 그런 책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쉬킨을 어떻게 생각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