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
앞으로 2년 후면 정년퇴직한다. 그럼 무엇을 하지? 사실 정년퇴직 후 할 일에 대해 몇 년 전부터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1년 살아보고 싶고 지구를 살리는 봉사활동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했다. 프랑스에서 바다를 지키는 봉사활동. 그런데 여행을 하며 봉사활동을 하는 지역에 프랑스는 없었다. 그리고 바다를 지키는 환경 봉사는 해변을 청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쿠버 다이빙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 일은 나중에 한국 해변에서 쓰레기나 주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유럽에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검색하니 두 곳이 눈에 들어왔다. 한 곳은 포르투갈에서 식량 구조 도우미로 일하는 거고 다른 한 곳은 아이슬란드에서 유기 약품과 유기 농사를 한다고 했다. 식량 구조 도우미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5시간 봉사 시간을 약속하는 것 외에 특별한 요구사항이 없었지만 유기농 환경 도우미는 주말을 빼고 하루 7시간 일해야 하므로 "건강하고 육체노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아이슬란드 일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에서 봉사하기로 정했다.
포르투갈. 코로나가 발생하기 몇 년 전에 남편과 갔었다. 12일간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구경하는 패키지여행이었다. 남편이나 나나 스페인은 각자 몇 번 간 적이 있었지만 포르투갈과 모로코는 처음이었다. 그때 우리는 딸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었다. 딸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사람을 반대했더니 딸이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남자는 한국에 있고 딸은 미국에 있으니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는 말에 기대를 걸었으나 딸은 오히려 더 완강했다. 30살이 넘은 성인 자식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내 마음은 쉬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포르투갈 파티마 성지에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리스본에 가서 베렘 타워(Belem Tower) 앞에서 사진 한 방 찍고 툭툭(Tuk Tuk) 이를 타고 도시를 활주 했다. 당시 우리가 대여한 툭툭이 기사는 포르투갈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대학원 생이자 툭툭이 4대를 갖고 있는 사장이었다. 영어를 편하게 잘 구사해서 어떻게 영어를 배웠는지 물었더니 포르투갈은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했다. 포르투갈에 이틀밖에 있지 않았던 게 아쉬웠는데 봉사활동을 하며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엄마 프랑스 갈 때 WJ 데리고 가세요." 정년퇴직하면 프랑스에 갈 거라고 말했더니 딸이 한 말이다. "엄마 아빠 미국 가서 살게 되면 WJ 데리고 가세요. 제가 생활비는 드릴게요." 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워야지 왜 내게 맡기니?라고 하려다가 나를 믿고 한 말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자식이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어도 손자가 아무리 예뻐도 정년퇴직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싶다. 더구나 곰곰이 생각하니 내 양육 방법이 썩 좋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독립적인 어른이 되는 걸 방해했다. 미국에선 만 16살이면 받을 수 있는 운전면허증을 우리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며칠 전에 받게 했다. 그때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데려왔다. 왜 그렇게 아이들을 믿지 못하고 모든 걸 내가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바움 린드가 말한 부모의 4가지 양육태도를 읽어보니 나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권위적이었지만 독재적인 때도 있었고 허용적인 때도 있었고 심지어 방임적인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독재적이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권위적이었고 대학교 때는 멀리서 공부하는 게 안쓰러워 거의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줬다. 그런데 이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내가 아이들의 사랑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취했던 행동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나와 내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형성된 왜곡된 믿음이었다.
나는 매우 독재적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마도 내 나이 또래 많은 사람이 그랬을 거다. 부모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부모에게 대든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래서 무조건 부모의 말씀은 듣기만 하고 따르면 됐다. 그런데 이런 절대적 복종은 결혼을 하자 남편에게까지 요구했다. 다행히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명절만 잘 참고 지나가면 됐다. 그러다 50이 넘어 내 생각을 조금씩 말했더니 아버지는 격노하셔서 나를 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화내시면 힘들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어쩌면 많은 사랑을 주셨을 거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서 사랑이 가려졌다.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받고 싶었던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주며 민주적인 방법으로 양육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딸의 생각은 달랐다. 20대 중반까지 자기 목소리 없이 부모를 만족시키며 진로를 정하다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고 했다. 34살인 딸은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는 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진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부모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저는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선택한 사람이나 선택한 삶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건 제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 문제예요. 그리고 부모님은 묻지도 않은 조언을 다 말하는데 왜 저는 제 생각을 말하지 못해요? 부모님이 많은 걸 희생했다고 하지만 제가 제 생각을 말할 수 있고 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건 박사학위를 하면서 심리상담을 받은 결과지 부모님이 해 준 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말을 들을 바에야 차라리 우리 부모의 일관된 독재적인 훈육 방식이 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더니 남편은 딸이 지금 마음이 많이 힘든 모양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부모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니 그냥 들어주자고 했다. 딸이 30까지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으니 그걸로 만족하자고 했다. 남편 주위에는 자식 때문에 힘든 사람이 많아서 우리 딸의 이런 행동은 큰일이 아니라고 했다. 딸이 사위와 함께 WJ를 잘 키우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혹시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잘해줄 준비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남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