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프랑스 중세 이야기
이 글은 에릭 제거(Eric Jager)의 더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을 바탕으로 쓴 글 이어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듀얼이 일어났던 장소 묘사나 갑옷을 입는 모습 등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 경우 필자가 번역한 것입니다.
1386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샤를 (Charles IV) 왕은 100일도 안 된 황태자를 잃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헤롯 왕이 영아 학살을 저지른 날이어서 사람들은 불길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샤를은 예정대로 새해를 앞두고 여는 축제를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거행한다. 파티의 절정은 듀얼. 바로 장 드 카루즈(Jean de Carrouges)와 자크 르 그리(Jaque Le Gris)가 죽을 때까지 결투하는 거다.
1386년 12월 29일. 결투의 날. 기사 카루즈와 대지주 르 그리는 미사를 드린다. 전날 파리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이들이 승리하길 기원한다. 씻고 기도하고 먹은 후 전투를 위한 옷이 입혀진다. 우선 천이나 가죽 신발을 신고 그 위에 쇠사슬이나 철판을 이어서 만든 사바톤(sabaton)을 덮는다. 그다음엔 레깅스을 입은 후 정강이 무릎 허벅지 전면에 철판 갑옷이 덮인다. 쇠사슬 갑옷 스커트는 허리에서 다리 위쪽까지 내려온다. 몸통을 보호하는 하우베르전(Haubergeon)이라는 민소매 갑옷은 가죽 벨토로 허리를 조인다. 그 위에 비늘처럼 겹쳐진 금속판으로 덮인 누비이불 코트나 단단한 강철 흉갑을 걸친다. 어깨와 팔뚝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판이 추가된다. 쇠사슬과 정교한 철판으로 접합된 장갑은 더 나은 그립을 위해 손 안쪽은 천이나 가죽 안감이 노출되어 있다. 목은 강철 고리로 에워싼다. 마지막으로 머리는 푹신한 가죽 모자로 덮고 그 위에 경첩이 달린 바이저(visor)가 있는 헬멧 유형인 베시넷(bacinet)을 쓴다. 또한 목에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쇠사슬로 만든 카메일(camail)을 걸친다. 부리 모양의 바이저에는 아주 작은 눈구멍과 숨구멍이 뚫려 있고 바이저를 올리면 얼굴과 턱이 드러나지만 착용한 상태에선 착용자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갑옷 위에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진 민소매 코트인 꼬트 다르무르(cotte d'armure)를 입는다. 이리하여 완전한 복장의 무게는 무기와 기타 장비를 포함하지 않아도 약 60파운드 (27.2킬로그램)가 나간다.
축제일이기도 하고 일 년 가까이 회자된 사건이라 살이 에이는 듯한 추운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오전 7시 30부터 수도원 주위로 줄을 서기 시작한 사람은 곧 수천 명으로 불어난다. 울타리와 성문으로 군중이 밀려오는 걸 막기 위해 벽으로 둘러싸인 들판 주위에 창과 철퇴로 무장한 경비병이 배치된다. 이날 참석한 주요 관중은 당연히 샤를 왕과 그의 삼촌들이다. 전투는 정오다. 그러나 샤를과 삼촌들은 그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고 왕이 자리에 앉으면 결투의 공식 의식이 시작된다는 걸 아는 관중은 샤를의 행렬로 시선을 돌린다. 왕은 결투의 주요 관중일 뿐만 아니라 재판장이기도 하다. 의회는 왕의 이름으로 결투를 승인했다. 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샤를은 결투의 판결을 내려야 한다.
왜 카루즈와 르 그리는 피 튀기는 결투를 하게 됐나? 바로 카루즈의 아름다운 아내 마가리트 때문이다. 카루즈의 친구였던 르 그리가 마가리트에게 반해 몹쓸 짓을 한 거다. 그러나 카루즈는 순수하게 아내의 명예만을 위해 싸운 게 아니다. 르 그리가 자기보다 못한 가문 출신임에도 피에르 백작의 신임을 독차지해서 질투한다. 피에르는 카루즈가 원했던 땅을 르 그리에게 주고 카루즈의 부친이 사망하고 카루즈가 마땅히 받아야 할 땅마저 르 그리에게 준다. 카루즈는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우는데 르 그리는 전쟁에 나가지도 않고 피에르 옆에서 승승장구한다. 르 그리가 미울 수밖에 없다. 한때 르 그리는 카루즈 아들의 대부였을 정도로 친했다. 그러나 카루즈의 아내와 아들이 죽고 마가리트와 재혼하고 땅 문제로 르 그리와 사이가 소원해진다.
중세 유럽이 어떤 시대였나? 십자군 전쟁이 잠잠해지면 왕과 와비, 형제자매 사촌이 왕좌와 영토를 놓고 싸웠다. 그중 프랑스는 가장 부유한 국가였으나 1339년 영국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백년전쟁이 시작됐다. 왕을 포로로 데려가서 막대한 몸값을 치르자 귀족이 왕을 배신하고, 세금에 분노한 농민은 영주를 살해하고 시민들은 적대적인 파벌로 분열됐다. 게다가 1348년부터 1년 동안 흑사병, 만성적인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태어날 때부터 땅에 묶인 농노는 국가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거의 없고 전쟁 시 보호해주는 지주를 섬겼다. 마찬가지로 지주도 더 큰 땅을 가진 영주를 섬겼다. 특히 영주에게 무릎을 꿇고 "주인님, 저는 당신의 남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영주에게 입맞춤하면 평생 그를 섬겨야 했다. 이런 의식이 사회를 하나로 묶고 상호 유대를 공고히 했다. 그런데 주인과 영주 사이의 평생 유대는 주로 땅을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토지는 봉건 귀족의 부, 권력, 위신의 주요 원천이었으며 상속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영속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귀하고 탐나는 땅은 싸움과 불화의 원인이었다. 바로 이 땅을 두고 르 그리와 카루즈의 사이도 벌어졌다.
그러나 지인의 잔치에서 만난 두 사람은 화해한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카루즈는 아내 보고 르 그리에게 키스를 하라고 한다. 화해한 기념이라나? 카루즈도 르 그리가 여자를 밝힌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그런 그에게 키스라니! 술을 너무 마셨나? 둘 이 화해하자 사람들이 좋아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든다. 아내도 남편이 좀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복종한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은 마가리트. 그녀의 입맞춤을 받은 르 그리는 어땠을까?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게 아닌가! 마거리트에 대한 르 그리의 관심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집에 아무도 없는 어느 날 도망가는 마가리트를 끝까지 쫓아가서 끔찍하게 겁탈한다. "부인, 만약에 당신이 누군가에게 여기서 일어난 일을 말하면 당신은 불명예를 당할 겁니다. 당신 남편이 들으면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도 조용히 있을 겁니다." 야만적인 행동을 하고 말은 고상하다.
이 놀랍고 슬픈 이야기를 독서모임 덕분에 읽었다. 1386년 1월 18일 중세 프랑스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건. 겁탈이 드물었다는 게 아니라 겁탈당한 여인 마가리트가 남편 카루즈를 앞장 세워 강간범 자크 르 그리를 고소한 일이어서 당시는 물론이고 후세에도 이 사건에 대해 말이 많았다. 과연 마가리트가 진실을 말했을까부터 마가리트가 죄의식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런데 이 이야기가 아직 소설로 쓰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미국 대학 교수 에릭 제거( Eric Jager)가 이 사건의 기록을 찾아 책을 냈고 그 소설이 얼마 전에 영화로 나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가리트다. 여자가 남편과 동등한 사람이 아니라 남편의 물건이라고 여기던 시절, 마가리트는 거의 1년의 재판을 견디며 남편보다 세력가였던 르 그리를 듀얼로 끌고 간다. 얼마나 많은 시달림이 있었을까? 재판장에서 치욕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일관됐다. 만약 카루즈가 듀얼에서 지면 마가리트도 화형을 당한다. 이 삼십 분 동안 서서히 타서 죽는 거다. 나라면 100일도 안 된 아들을 두고 화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길을 택했을까? 마가리트도 망설였을 거다. 여기서 내 이야기는 멈추겠다. 나머지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길 권한다. 책에는 법정 기록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많은 정보가 있다. 영화는 감독이 해석한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고 듀얼의 디테일이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