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실 때까지 쭉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보이는 두 남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봤다. 채널을 멈췄다. 여자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 놓인 악보를 보며 주름진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피아노를 치고 남자는 옆에서 듣고 있다. 여자의 손가락은 실핏줄이 다 보이고 마디는 굽었고 피부는 너무 건조해서 갈색 나뭇잎을 연상케 했다. “여기는 이렇게 치는 거예요.” 여자만큼 나이 든 손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시범을 보였다. 여자가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몇 번만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요.” 여자는 남자를 한번 쳐다본다. 그리고 같은 구간을 반복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선율이다. 나이 들어 남편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걸까? 여자가 곡을 끝내자 남자가 박수를 치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둘은 포옹했다. 내 예상과 달리 남자는 피아노 선생님이고 여자는 제자였다. 92세 피아노 선생님과 그 정도쯤 나이 들어 보이는 제자가 아파트 문을 열고 나왔다. 남자가 문을 열어서 잡고 있고 여자가 나온다. 그리고 여자는 워커를 펴서 아파트 앞에 세워둔 자동차로 간다. 여자가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걸 보고 남자는 다시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선생님도 대단하지만 워커에 의지해 걸으면서도 혼자서 운전하고 피아노를 배우러 온 제자도 멋지다. 나도 돌아가실 때까지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더 잘하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신체와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사람은 기구를 써서라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면 제대로 사는 거지만 누구의 도움 없이 기동 할 수 없다면 삶의 질이 훨씬 떨어질 거다. 그래서 나이 들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 옛날 연속극을 보니 60세에 벌써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만 먹고 앉아 있는 어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옛날에야 젊었을 때 고생한 사람도 많고 가전제품도 변변치 않고 평균수명도 짧았으니 돌아가시기 전에 좀 편하게 지내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일상에서 잘하던 걸 못하게 된 건 비단 나이 때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계산기를 쓰지 않아도 잘하던 암산을 계산기에 의지하면 셈이 느려지고 자신감도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은 계산기를 자주 쓰기 시작한 30대 후반에 느꼈던 일이다. 그래서 그 후 암산을 다시 생활화했더니 계산하는 게 전처럼 편해지고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젊었을 땐 노후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만으로도 곧 63세가 된 노년기에 들어서니 문득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쉽다. 그렇다고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서툴고 어리석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살았다. 이젠 남은 생을 잘 보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덜 먹고 더 걷고 더 공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도 심하고 장기도 몇 개 때어냈으니 건강하게 타고난 건 아니지만 담배는 말할 것도 없고 술도 체질에 맞지 않아 그 흔한 치맥조차 먹어본 일이 없어서 뼈도 혈액도 좋다. 다만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 단 걸 좋아해서 되도록 밖에서만 먹고 냉장고에 쟁여놓지 않는다. 그리고 되도록 모든 곳에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걸어 다닌다. 수업할 때도 4시간 동안 교실을 돌아다니며 강의한다. 그래서 수업이 있는 날은 만보를 채운다. 따로 운동을 더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시간 내서 운동하는 건 힘들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더 돌아다닐 일을 만들어 운동량을 늘리고 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일 중에 하나가 토요일에 프랑스 학원에 가는 일이다. 취미로 외국어를 배우는 건 매우 유익하다. 첫째,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된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비교하며 공부하면 양쪽 언어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어휘와 관용구를 익히는 재미가 있다. 둘째, 언젠가 프랑스에 가서 1년 살아보기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게 신난다. 셋째,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게 재미있다. 일주일에 하루만 투자해서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배워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걸 꼭 증명하고 싶다.
"뭣하러 프랑스어를 배워요?"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만큼 내겐 프랑스어 배우는 일이 즐겁다. 그렇다고 프랑스어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는 건 아니다. 매주 배운 내용을 복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토요일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날이다.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딸린 도서실에 가서 초 중등학생용 단편 소설을 한 두권 읽는다. 사람이 없으면 큰소리로 읽는다. 읽다가 딴생각하다가 읽은 내용 중 좋은 문장은 써보고 화장실 갔다 다시 돌아와 읽는다. 대략 3시간 정도 도서실에 머문다. 이렇게 해도 조금씩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프랑스에 가지 않아도 프랑스어를 꾸준히 하면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워커를 끌며 피아노를 배우러 간 노인처럼 나도 그 나이까지 토요일마다 프랑스 학원에 쭉 다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