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

by 명희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무언가 인류를 위해 큰 생각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소크라테스도 세네카도 순자도 석가모니도. 그리고 내가 아는 많은 작가도 그렇다.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산다는 게 어쩌면 고통의 연속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을 겪지 않는 세대에 태어나서 그런지 삶에 대한 진한 느낌이 없다. 적어도 내가 그렇다. 그냥 그럭저럭 산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은 별 특징이 없고 누구나 다 쓸만한 글이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바꾸고 싶지 않다. 설사 누군가 내게 어려움을 겪으면 명작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고 제안해도 고생을 사고 싶지 않다. 그냥 편한 게 좋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뭔가 대단한 걸 이루겠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거다. 그러나 100년 후 1000년 후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남기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나 같은 사람. 나는 누군가? 지능적인 면에서 아마도 중위 50%의 일원일 거다. 사회 경제적인 면에선 상위 20%에는 들 거다. 그러나 삶의 질을 좌우하는데 지능과 사회 경제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운이라는 요인이 더해진다면 나는 아마도 운 좋은 상위 10%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운 좋게 전쟁이 없는 시기에 중산층 집안에 태어나서 대학에 갈 수 있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딸 아들 한 명씩 낳아 부모도 되었고 사위와 손주도 있고 곧 며느리도 생길 것 같다.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큰 욕심이 없는 것도 운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티브이에 크고 좋은 새 아파트를 보면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걸 보면 갖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다. 이렇게 금세 마음이 바뀌는 건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청소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면 누군가 집에 오는 건데 그것도 신경이 쓰일 것 같다. 더구나 내 예산에 맞춘 큰 집으로 이사 가면 지금처럼 쉽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어서 운전해야 하는데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 주로 남편과 둘만 사는데 큰 집을 가질 필요가 있나? 큰 공간은 에너지도 많이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환경에도 안 좋고... 그래서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하니 나 같은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란 생각도 든다. 좀 더 새롭고 전보다 좋은 걸 계속 소비해줘야 하는데 새로 나온 물건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새로 나온 가전제품은 제법 많이 샀다. 로봇 청소기부터 세탁 건조기까지. 그런데 오늘 아침 세탁기를 돌렸는데 배수가 잘 안 됐다. 이런 작은 일도 골치 아프다. 그러나 빨리 해결해야 다시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서 서비스 센터에 전화했다. 다행히 약속이 당일 잡혔다. 약속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기사분이 전화했다.

언제 구입하셨어요?

한 일 년 됐어요.

배수가 안 될 때 어떤 글자가 보였나요?

배수가 안 된 건 아니고요. 배수 필터를 열었더니 평소보다 물이 꽐꽐 나오고 가끔 옷이 완전히 짜지지 않은 상태로 끝나 있어서요.

일 년이 안 됐고 에러가 뜨는 문제가 아니라면 하수구에 먼지가 꼈을 확률이 커요. 배수 필터에 먼지를 씻어주고 배수 호스가 있는 하수구의 먼지를 제거해 보세요. 부픔을 교체해야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그렇게 해 보고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연락하세요.

아 그럼 그렇게 해보죠.

사실 센터에 연락을 하고 세탁기를 다시 돌렸더니 이번에는 배수가 잘 됐다. 그래서 취소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기사분과 상담하고 취소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 이렇게 작은 일에도 마음이 불편한데 큰 일을 겪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티브이에 어떤 웹툰 작가가 나와서 전세금을 날릴 뻔한 이야기를 했다. 매우 꼼꼼한 사람 같았다. 전셋집을 보러 다닐 때 체크리스트를 갖고 다녔다. 주방 상태부터 조명까지 집안 내부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입신고와 확정일자에 "임차인이 입주하는 당일에 근저당을 설정하면 계약이 무효"라는 특약까지 넣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작가가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 등기부등본엔 근저당이 없는 깨끗한 집이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집주인이 부채 문제로 소송에 패하여 집이 넘어간 거다. 그러니 이런 것까지 세입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정말 운이 없었다. 게다가 집주인은 세금까지 체납해서 나라에서 집을 공매에 부쳤다. 경매에 공매에,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을 자그마치 3년이나 참고 견뎠단다. 집이 마치 감옥 같았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많은 경우 전세금은 전재산과 마찬가진데. 더구나 저금 밖에 몰라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이라고 했다. 천만다행하게도 작가는 이 집을 공매로 샀단다. 5천만 원 손해를 봤지만 집주인이 되고 나니 같은 공간이 다르게 느껴졌단다. 벽지도 바꾸고 가구도 사고. 그리고 3년간의 감옥 같았던 집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고 곧 방송에서 극으로 나온다고 했다. 와~ 마치 해피 엔딩으로 끝난 영화를 보듯이 기분 좋다.


난 도스도엡스키가 말한 정말 따분하게 아무 특징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게다가 엄청 겁도 많고 작은 일에도 초조하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작가처럼 저금 밖에 모르고 투자 같은 걸 해서 큰돈을 벌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돈을 번 사람은 그만큼 머리 아픈 일을 겪고 벌었다고 생각해서 마땅히 대가를 치르고 번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내가 갖고 있는 돈에 만족한다. 게다가 나는 벌써 너무 운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저 감사하고 감사한다. 이게 평범한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법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동의 제조